오키나와에 가족여행을 오니, 가족은 보이지 않고 온통 바다가 보인다. 숙소도 바다 근처이고, 이동을 하는 길도 바닷길이 대부분이다. 오키나와의 명소 츄라우미 수족관도 바다 곁에 있기 때문에 더 유명하다고 한다.
오키나와의 바다
그래서 내 눈에는 오키나와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바다와 연관된 일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사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인 게 바다는 전 세계 10억 명 이상의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주요 식량 공급원이고, 약 3억 명 어업종사자들의 삶의 터전이라고 한다. 세계 교역품의 약 80%가 바다로 운송되고 있으며, 석유의 약 30%가 해상 유전에서 생산된다. (네이버 및 챗GPT 교차 검색 결과)
이쯤 되면 세상에서 가장 큰 직장이자 일터는 바다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 주위에 직접적으로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항구 도시 부산에서 십 년 넘게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항상 공장이 즐비한 공단 근처에서만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에 어머니와 이혼한 후 아버지께서 원양어선을 타려고 준비했던 적이 있었다. 어린 나와 더 어렸던 동생은 할머니께 맡기고 본인은 배만 타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찌어찌해서 아버지는 원양어선을 타지 않았다. 가끔씩 그때 아버지가 원양어선을 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버지의 인생도 나와 내 동생의 인생도 많이 달라졌을까?
그래서일까?바다가 직장이자 일터인 사람들에 대한 동경憧憬이 있다. 동경東京의 일본, 오키나와에서 나만의 동경은 짙어진다.
여기, 거대한 바다를 일터로 각기 다른 인생을 살아갔고, 살아가는 세 사람이 있다. 늙은 어부 산티아고 님, 머구리 박명호 님, 그리고 해녀 김정자 님.
늙은 어부 산티아고님
앞서 언급한 세 사람 중 유일한 소설 속 인물이다. 바로 헤밍웨이의소설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그 노인이기 때문이다. 버마(미얀마)에서 시멘트 공장 노동자로 일할 때, 가족은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노동을 마치면 꽤 시간이 많이 남았드랬다. 그때 어렸을 때 읽었던 고전을 꽤 많이 다시 읽었다. 그중에 버마에서 읽었던 <버마시절>이 단연 압권이었지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도 기억에 남았다.
대충 줄거리만 보면,한 노인 어부가 먹고사니즘을 위해 몇 날 며칠 조금 큰 물고기(청새치)를 잡았지만 상어 떼에게 다 뜯겨 성과도 없이 빈털터리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특별할 것도 없다. 우리 회사원으로 치면, '몇 날 며칠 야근했지만 회사의 포식자(직장 상사)가 그 성과물을 가로챈다' 정도로 치환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특별할 것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소설의 맛'이 있다. 회사원이 직장 상사에게 삥 뜯긴 얘기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지만, 큰 맥락에서는 비슷한 얘기인 허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고 있노라면 묘하게 위로가 된다. 이게 문학의 힘이지 싶다.
여담으로 <노인과 바다>를 읽고, 라떼 맛을 알아버렸다.사흘이 넘게 바다에서 사투를 벌인 산티아고를위해 소년 마놀린이 준비한 게 우유와 설탕을 담뿍 넣은 커피이기 때문이다. 나는 심각한 '과민성 대장 증후군'을 앓고 있음에도 회사에서 지칠 때면(상어 떼한테습격을 당할 때면) 우유와 설탕을 담뿍 넣은 커피를 마신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어쩌면 소설 속 인물인 산티아고는 허구 속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 쿠바 코히마르 동네에있을 법한 인물이고, 우리 회사에 있을 법한 그 누군가인 것 같다. 그래서 위대한 고전은 오랫동안 읽히나 보다.
쿠바 코히마르 해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머구리 박명호 님
박명호 님은 2006년 탈북하여, 남한에서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가 북한과 가장 가까운 휴전선 인근 고성에서 머구리로 정착하였다. 다큐멘터리 영화 '올드 마린보이'에서 자세한 그의 인생 여정이 나와있는데 덕분에 머구리란 직업을 알게 되었고, 탈북민의 삶도 엿볼 수 있었다.
머구리란, 일본어 모구리(潜り)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잠수 어업종사자를 일컫는다. 성인 어른 몸무게만 한 60kg 가까운 장비를 착용하고 수십 분을 수십 미터 바다 안에서 버텨야 하는 직업이다.'머구리10명 중 5명은 포기하고, 3명은 죽고 1명은 아프고, 단 1명만이 살아남는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만큼 위험하고 고된 직업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머구리 박명호 님은 자신이 노력한 만큼 벌 수 있고, 남한에 정착하여 가족들을 건사할 수 있어 머구리란 직업을 천직으로 삼는다고한다.
머구리 박명호 님. (출처: 영화 '올드 마린보이')
해녀 김정자 님
영화 '물숨'의 주요 등장인물인 해녀 김정자 님은 나이가 팔십을 넘긴 해녀이면서 동시에 손주 둘을 건사하고 있다. 그녀의 딸 또한 해녀였는데 어머니와 달리 뭍으로 나가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상 어머니를 이어 해녀가 되었으나, 바다에 들어가서 돌아오지 못했다. 딸자식을 잡아먹은 바다이지만 남은 손주를 위해서 김정자 님은 또 바다로 들어간다.
'해녀 사회'에서도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다. 해녀들은 각각 상군上軍, 중군中軍, 하군下軍의 계급이 정해진다. 그 계급을 결정짓는 것은 '숨'이다. 물속에서 숨을 참을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들어갈 수 있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지고, 수확하는 해산물이 달라지고, 이는 곧 수입으로 이어진다.
상군의 경우, 수심 15~20m, 중군은 9~5m, 하군은 3m 깊이의 바다에서 작업한다. 상군일수록 위험하지만 깊은 바다에서 비싼 수확물을 얻을 수 있다. (참고로 해녀 김정자 님은 중군이라고 한다)
해녀의 '숨'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 중, 하군이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상군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해녀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숨의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숨의 마지막에 이르기 전 바다에서 무사히 나올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해녀도 인간인지라 자신의 숨을 넘어 더 좋은 해산물을 캐내고 싶은 욕망이 있다. 조금만 더 숨을 참으면 눈앞의 전복을 캘 수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자신의 숨의 한계를 잊어버리고 바다에 잡아두는 욕심과 욕망 때문이다. 그 욕망 때문에 자신의 숨을 넘어서는 순간, 바다 안에서 '먹게 되는' 숨이 바로 '물숨'이다. 김정자 님의 따님도 이 '물숨'을 먹고 뭍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실 '물숨'은 해녀들 사이에서는 금기어다.
영화에서 모든 해녀가 멋있고, 존경스러웠지만 가장 닮고 싶은 해녀는 따로 있었다. 하군인 어떤 해녀. 그녀는 바다의 지형을잘 알고 있어 어디에서 좋은 해산물이 있는지 정확히 알았으며, 지난번에 많이 수확한 곳을 피해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좋은 해산물을 수확했다. 타고난 숨의 길이를 극복한 해녀였기 때문이다.
해녀 김정자 님. (출처: 영화 '물숨')
이렇게 정리해서 보니, 바다가 직장이자 일터인 분들에게 오히려 나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바다라는 일터와 사무실이라는 일터는 똑같이 일을 배우고 일을 하는 곳이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바다라는 거대한 일터에서는 인생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p.s. 회사에는상어 떼만 있는 게 아니고, 마놀린도 있다. 꼰대의 그 라떼말고 진짜 우유가 담뿍 들어간 라떼를 권해보자. 그러면 당신은 마놀린이될 것이다. 직장에서 마놀린 같은 한 사람만 있어도 다닐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