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그다드Cafe Jun 28. 2024

달동네와 월남에 대한 세가지  기억(上)

월남에서 돌아온 쌔까만 김상사

어렸을 때 부산의 어느 달동네에 오래 살았드랬다.


가만히 보면, 달동네는 참 낭만적인 표현이다. 풀어쓰면 '달과 가까운 동네' 쯤이지 않을까.


반면 냉엄한 현실을 반영한 경제 용어 표현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싼 곳을 찾다, 결국 싼 곳은 높고 불편한 곳임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가난한 사람들이 모인 주거 단지' 쯤이지 않을까.


다만, 처음으로  달동네라고 이름 지은 그분께 감사할 따름이다. 내 어린 시절이 삭막한 경제 용어에 폄훼되지 않게 막아줬으니. 내 추억을 달동네에서 지켜줬으니. (그러고보니 나는 지금도 서울의 높은 지대, 산山 바로 밑의 35년된 아파트에 살고 있다. 높은 곳에 사는게 운명인가...)


오늘은 달동네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어렸을 때 살던 부산의 어느 달동네 이웃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이고, 월남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1. 월남전에 대한 첫 번째 기억


부산 달동네에 대한 여러 기억 중, 월남에서 돌아온 아저씨가 있다. 흐릿하긴 하지만 영화에서 보던 갈고리 의수를 끼고, 술에 취하면 동네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던 그런 캐릭터는 분명 아니였다. 가족도 없이 혼자 살며, 어딘가 우울해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다보니 이상한 소문이 많았던 것 같다. 예컨데, 아내가 월남 파병 중에 돈 싸들고 도망 갔다는 둥, 베뜨꽁 수십 명을 죽여서 귀신이 씌였다는 둥,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높은 나랏님한테 훈장을 받았다는 둥.


얼추 계산해보니, 지금의 내 나이가 그 때 그 아저씨의 나이와 비슷할게다. 월남 파병과 아프간 파병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나도 파병을 다녀왔다. 그러다보니 그 아저씨의 기분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아저씨를 상상하며 나의 소설에 등장시켰다. (#3. 월남전에 대한 세 번째 기억 참고)


#2. 월남전에 대한 두 번째 기억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 김언수 작가님의 소설 <뜨거운 피>에서 베트남 출신 용병 건달인 '탄'이 월남전에 대해 건낸 말이다. 월남전을 바라보는 대다수의 한국인의 시선과는 분명히 달라, 나름 의미가 있다. 다음은 <뜨거운 피>의 일부분이다.


탕이 정글칼을 쥐고 있는 사내를 쳐다보더니 자기도 멋쩍은지 피식 웃엇다. 탕은 베트남 사내치고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얼굴에 이국적인 면이 있었는데 아마 프랑스나 영국계 혼혈 같았다. 탕과는 식재로 밀수 때문에 몇 번 일을 같이한 적이 있었다. 머리가 잘 돌아가고 통솔력이 있는 친구였다. 영어, 러시아어, 한국어에 두루 능통했고 베트남에서 대학교육까지 받은 인텔리였다.


"니 두목 좀 만날 수 있나?" 희수가 물었다.


그러자 탕이 얼굴을 찡그렸다.


"용강은 내 보스 아니다. 용강은 동업자." 탕이 자존심 상한 듯 퉁명스레 말했다.


희수가 만난 베트남 사람들은 대체로 자존심이 강했다. 예전에 탕과 술을 마시다가 무슨 이야기 끝에 미안하다고, 조국을 대표해서 너희 나라에 사과한다고 희수가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었다. 한국이 월남전에 참전해서 베트남 사람들을 죽인 것에 대한 사과였다. 그때 탕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우리가 이긴 전쟁인데 너희들이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미안은 이긴 놈이 진 놈한테나 하는 거야. 너희가 지고 우리가 이긴 거야. 프랑스건 미국이건 우린 전쟁에서 진적이 없어. 그리고 우린 그딴 거 벌써 다 잊어버렸어. 왜냐? 우리가 이긴 전쟁이니까." 탕은 조금 취했지만 당당하고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때 희수는 생각했다. 그렇구나, 이긴 놈들은 용서도 하고 잊기도 하고 그러는구나. 만날 얻어터진 나라만 잊지도 못하고 용서도 못하는거구나.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