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위에는 왜 재밌는 사람이 없는가
<나의 돈키호테>를 읽고,
내 주위의 어른(내가 80년대 중반에 태어났음으로, 여기서 말하는 어른이란 형 혹은 선배라고 부르기 애매한 60년대 생을 지칭)에 관심이 많다. 왜냐하면 10년 후, 내 모습이기 때문이다. 시간 여행을 떠나 10년 후의 내가 지금 내 주위에 있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관심이 갈 수 밖에. (가끔씩 소름도 돋는다)
내 주위의 어른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 80년대에 학생 운동을 한 어른이 없다. 영화 '1987'를 기억하시는지? 영화를 통해 뜨겁게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는 무수히 많은 그 시절의 대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왜일까? 4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학생 운동이라는 단어 자체가 껄끄러운 것일까? 아니면 샤이한 학생 운동가여서 밝히기 힘들기 때문일까?
두 번째, 내 주위의 어른들은 왜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 왜 독특한 컨텐츠를 가진 어른이 없을까? 회사 생활, 사회 생활을 하며 수 많은 어른들께 수 많은 얘기를 들었다. (과장을 아주 조금 보태) 수 많은 얘기를 다음 몇가지 카테고리로 단순화해 나눌 수 있는 정도다. 어떻게 그리 쉽게 나눌 수 있느냐고? 컨텐츠가 빈약한 어른들의 말은 소재도 제한적이고, 대부분 자기 자랑과 합리화로 귀결되기 때문에 몇 가지 패턴만 익히면 충분히 단순화 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음을 보시라.
1.회사(일) 얘기하면서 자기자랑(내가 과장 때는 날라다녔다는 둥) 혹은합리화(그때 내가 너를 혼낸거는…)
2. 골프 얘기하면서 자기자랑(타수가 어떻다는 둥, 얼마나 힘든 상황에서 골프를 배웠다는 둥) 혹은 합리화(나는 골프가싫지만 회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주말을 반납하며 새벽부터 공을 날린다는 둥)
3. 회사 사람과 골프친 얘기
김호연 작가님의 신작 <나의 돈키호테>를 통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다음은 답과 관련된 소설의 일부분이다.
영상에는 없지만 저는 권 사무장에게 물었습니다. 돈 아저씨는 왜 그렇게 공부보다는 학생운동에 열중했는지를. 그는 제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 시절엔 싸우지 않고는 제대로 된 자유를 얻을 수 없었고, 영수는 누구보다 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앞장서 싸운 친구였다고요.
아, 이 대목에서 제가 80년대 군사독재 정권에 대해 조사해봤습니다. 그 시절엔 등굣길에도 불심검문을 당하기 일쑤였고, 사복 경찰이나 전경이 가방 속까지 막무가내로 뒤졌다고 합니다. 거부하면 경찰서에 끌려갔고요. 그런데 여성분들은 가방 안에 위생용품도 있을 텐데 그게 강제로 공개되는 수모를 겪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또한 80년대는 경찰들이 학교에 상주하며 학생들을 늘 감시했고 때론 군인들이 수업을 폐강시키기도 하고 아예 학교가 폐쇄되기도 했답니다. 이게 과연 학생들이 불온하고 데모만 해서일까요? 군인들과 경찰들이 대학 캠퍼스에 무작정 들어오지 못하는 사회, 그런 기본적인 인권과 교권이 지켜지는 사회를 위해 그 시절 돈 아저씨 같은 분들이 싸운 게 아닐까요?
"아무튼 90년대 초반에 좋은 대학 나왔지만 운동권 출신이라 직장 구하기 쉽지 않은 영수같은 친구들이 진출하는 업종이 몇 있었어요. 먼저 정치계.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보좌관을 하거나 사회단체에서 정치활동 하는 거죠. 그다음이 언론계. 이건 메이저는 못 가고 진보적 성향의 신문이나 잡지 쪽이죠. 그다음이 문화계. 그러니깐 출판이나 영화 쪽이고. 마지막으로 학원계가 있었어요. 운동권 선배들이 강남의 사교육 시장에 학원을 차려 제법 재미를 봤거든. 학벌 좋고 공부 머리도 있으니 학원 강사 일이 그들한테 적격이었죠. 게다가 영수는 아이들을 참 좋아했어요. 같이 자취할 때도 주인집 애들 공짜 과외 해주고 그랬다고."
그렇다. 내 주위에 어른들(부장님 혹은 상무님 혹은 사장님, 이하 '부상사님')은 분명 격동의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그러나 학생 운동에는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면 좋은 직장 구하기는 거의 불가능했고, 지금의 부상사님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산업화의 역군으로 IMF를 이겨내고, 금융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부상사님을 적극적으로 학생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 분들이 다져 놓은 회사에서 나도 일을 하며 아기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나한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 만약 내가 80년 대에 대학을 다녔더라도, 서슬 퍼런 군사 정권 하에서 독.재.타.도.를 외치며 학생 운동에 적극 가담할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아니, 높은 확률로 내 주위의 부상사님들처럼 세상에는 눈을 감은 대신, 우직하게 공부하며 취직 준비만 했을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인 왜 내 주위의 어른들은 재미가 없고, 같은 소리만 할까?에 대한 답도 <나의 돈키호테>에서 구할 수 있었다. 다음은 소설의 일부분이다.
"기억나니? 네가 옛날에 이렇게 물었단다. '아저씨는 왜 어른들이 안 쓰는 말만 써요?' 꿈, 희망, 정의, 자유 같은 말만 자꾸 들먹인다고 따지듯 물었었지."
"기억 안 나요."
"그럼 내 질문도 기억이 안 나겠구나. '솔아, 너는 어떤 말을 쓰는 어른이 되고 싶니?'라고 내가 되물었거든.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나니?"
"그것도 기억 안 나죠."
"기억 안 해도 돼. 이제 너는 어른이니 지금 네가 쓰는 말이 그때의 답일 거다."
소설에서 구한 답은 바로 '나'였다. 내가 재미없는 일을 하고, (꿈과 희망과는 거리가 먼) 지루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주위에 흥미로운 어른들이 없는 것이었다. 몇 일 전, 장강명 작가님의 신작 <미세 좌절의 시대> 북콘서트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 때 장 작가님의 얘기를 들으면서 어쩜 저런 생각을 할까, 어쩜 저렇게 남다른 시야를 가질 수 있을까, 하고 놀라면서 부러웠다. 어쩜어쩜어쩜의 연발이었다. 모처럼 내가 닮고 싶은 어른을 만난 기분이랄까?
마지막으로 내 스스로 흥미로운 어른이 되기 위해 정신 똑.띠. 차려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소설 속의 일부분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
"솔아. 사람은 평생 자기를 알기 위해 애써야 해. 그래. 나는 스스로를 돈키호테라 이름 짓고 살아왔지. 하지만 <돈키호테>를 받아쓰면 받아쓸수록, 세상에 맞설 내 이야기를 쓰면 쓸수록, 나는 돈키호테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어. 돈키호테라면 벌써 그 모든 불의와 부패를 향해 몸을 던지지 않았겠니? 그런데 나는 한순간도 온전히 몸을 던지지 못했어. 그저 시늉만 한 거야. 나는 범접할 수 없는 돈키호테를 따라다니며 그를 흉내 낸 산초일 뿐이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