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와 월남에 대한 세가지 기억(下)
고엽제 부작용
달동네와 월남전에 대한 세가지 기억(上)과 이어집니다.
#3. 월남전에 대한 세 번째 기억
유명 웹소설 <아들, 정당한 테러>의 일부이다.
미주 위로 첫 돌을 못 넘기고 죽은 자식이 두 명이나 되었다. 미주는 그런 사실을 잘 모르다가 어느 늦은 밤에 부모님의 대화를 엿듣고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미주는 내색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벌써 십년이 지났네요. 미주 언니, 오빠가 죽은지...”
그저 가만히 듣기만 하던 미주 아버지는 많은 회한이 들었다. 기분탓인지 이미 등이 굽어오기 시작했던 미주 아버지의 등은 더욱 쪼그라들어 보였다.
“내 탓이지... 내가 월남에서 몹쓸 짓만 하지 않았어도...”
“당신이 무슨 죄가 있나요? 그저 나라에서 시키는 데로 한 죄밖에 더 있나요?”
“아니여... 아무리 그래도 그러면 안됐어... 그래서 나도 이렇게 병신이 되고, 미주 언니 오빠 목숨도 다 앗아간 거여.”
본디 미주 아버지는 충청도의 한 시골 출신이었다. 전형적인 베이비부머 세대의 제일 앞자락에 태어난 미주 아버지는 그저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충청도 고향에서는 도무지 가난에서 헤어 나올만한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청년 강만수(미주 아버지)는 더 큰 대전으로 가서 살 길을 궁리하겠 노라 결심했다. 만약 그 때 서울로 갔다면 강만수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나마 대전은 고향보다 일거리가 꽤 있었다. 한창 경제개발 붐으로 대전이 한반도의 물류 허브가 되어 사람과 돈 되는 물건들이 쉼 없이 오갔기 때문이었다.
무릇 사람이 있는 곳에는 돈이 끓는 법이었다. 하지만 강만수는 요령이 없었다. 그저 열심히 살면 되는 줄 알고 하루도 허투로 살지 않았다. 대전역 근처의 물류 회사에서 일했는데 김정숙(미주 엄마) 여사를 만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말이 물류회사지 일의 성격은 막노동과 다름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화물을 재분류해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으로 올라가는 열차에 다시 싣는 작업이었다. 대전이 고향이 아닌 비슷한 또래 동무들 3명과 대전역 근처에 하꼬방을 잡고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먹는 끼니도 부실했으나 빠듯한 월급으로는 맘놓고 음식을 사먹을 수도 없었고, 남자 4명이 모여 사는 곳에서 제대로 된 끼니를 해먹을 수는 없었다. 그저 싸고 양을 많이 주는 대전역 근처 식당을 전전할 뿐이었다.
그때 어느 한 식당에서 미주 엄마인 김정숙씨를 만나게 되었다. 김정숙은 부산 구포 출신이었다. 먼 친척이 구포에서 국수 공장을 운영하였는데 처음에는 그곳에서 일했다. 당시에는 미국 원조를 통해 싼 값에 밀가루가 대량으로 유입되던 시기였다. 한국땅에서 베이비붐으로 인해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으나 쌀 생산량은 이를 따라가지 못했고 쌀 값이 폭등했다. 정부에서는 토지 개간 및 신품종 개발 등을 시행했지만 이는 중장기적인 대책이라서 단기적인 부족 현상을 해결하긴 힘들었다. 이를 위해 정부에서는 쌀 소비를 줄이는 방안 또한 찾아야 했다. 마침 미국에서 밀가루나 옥수수를 대량 원조하였기에 그것들을 이용했다.
두 번째는 박정희 정부의 경제 계획이다. 박정희 정부는 수출 지향의 공업화와 저임금 정책을 폈다. 저임금을 통해 수출 상품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 저임금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선 노동자들이 저임금으로도 생활이 가능해야 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쌀값 문제가 걸림돌이 되었다. 따라서 쌀 소비를 줄여서 쌀값을 낮추고 이를 통해 저임금 기조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했다. 당시 김정숙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잘 알지 못했고 국수업에 종사하였다. 딱히 시대적 배경을 모른다고 국수업에 종사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구포 국수 공장에서 일을 하며, 간간히 직접 뽑은 면으로 잔치국수를 만들어서 일하는 사람들과 먹었다. 별 비법은 없었다. 시장에서 거의 공짜로 얻어온 멸치로 다시물을 우려낸 뒤, 간장 양념이 다였다. 하지만 김정숙 여사의 국수는 국수 공장의 인부만 먹기에 아깝다는 내부의 평가가 다분했다. 낭중지추(주머니의 송곳은 숨길 수 없다)라고 했던가. 김정숙 여사가 근무하던 국수공장은 전국의 국수집을 대상으로 납품했는데, 대전의 어느 한 국수가게 주인이 그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김정숙 여사에게 스카웃 제안을 하였다. 조건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국수공장에서 받는 급여의 2배에 숙식 제공 조건이었다. 김정숙 여사 나름 포부가 있었던지라, 대전에서 경력을 쌓고 서울로 진출해 국수집을 하겠다고 생각하고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였다. 미래의 남편 강만수를 만나게 되는 중요한 결정이었다.
강만수는 맛도 좋고, 양도 많은 김정숙 여사의 국수집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에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국수집을 찾았다면, 나중에는 김정숙 여사에게 호감이 생겨 국수집을 더 찾게 되었다. 강만수 동료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의 강만수는 일주일에 10번 이상을 그 국수집에 다녀갔다고 한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김정숙 여사에게 물어보면, 그저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젊었던 강만수와 김정숙 여사의 가장 찬란한 시기였으리라. 그렇게 매일 같은 국수집을 다녔던 강만수는 김정숙 여사와 자연스레 사귀게 되었고 그 시절 연인이 으레 그렇듯 자연스레 결혼을 꿈꿨다.
가히 국수가 맺어준 인연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강만수도 김정숙 여사도 결혼하기에는 돈이 없었다. 김정숙 여사는 사글세 방으로 신혼을 시작해도 관계없다고 강만수를 설득했다. 하지만 강만수는 최대한 김정숙 여사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당시는 남자의 로망이 아내가 될 사람에게 '손에 물 묻히지 않게 해줄게. 결혼하자’라는 허언이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은 하고 싶고, 돈은 없던 강만수의 눈에 한 공고가 눈에 띄었다. 바로 월남 파병 지원자 모집 공고였다. 강만수는 월남 파병 2년 동안 살아 돌아기만 하면 서울 변두리에 집을 살 수 있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다. 당시 미국이 한국의 파병 조건으로 달러 월급을 지급한다는 것이었는데, 한국 정부는 귀한 달러를 바로 원화로 바꾸어 파병 군인들에게 지급했다. 그 돈이 당시 큰 기업 월급의 3배가 훨씬 넘었다고 한다.
달러 파워에 목숨 값이 더해진 총합이었다. 목숨 값이긴 하지만 강만수는 이미 파병을 결심했다. 3대 독자인 강만수는 본디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됐지만 월남 파병 모집은 따로 상관없이 소정의 면접만 통과하면 된다는 정보도 입수하였다. 문제는 결혼을 약속한 김정숙 여사였다. 자신은 있었지만 그래도 2년 동안 기다려줄지 강만수는 걱정이 되었다. 강만수는 결심하고 대전역 앞 경양식 집에 김정숙 여사를 초대했다. 김정숙 여사는 메뉴판의 가격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이렇게 비싼 밥을 어떻게 먹어요? 다른데 가요.”
“괜찮습니다. 오늘 같은 날 먹어야지요.”
“오늘 같은 날이 무슨 날인데요?”
왠지 정숙은 불안했다.
그런 정숙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만수는 돈까스 두 개를 시켰다. 전채요리로 스프가 나왔다. 사실 국수의 달인 정숙조차도 경양식은 첫 경험이었다. 그래서 모든 게 낯설었지만 음식은 너무 맛있었다. 만수도 처음이었지만 짐짓 티를 내지는 않았다. 동료의 동료에게 특별히 과외를 받았다. 스프를 먹는 방법, 돈까스를 써는 방법 등 수십번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그렸기 때문에 능숙하게 돈까스 칼질을 했다. 만수의 의도가 걱정됐던 정숙도 처음 먹어보는 돈까스 앞에 걱정을 접고 그저 맛있게 돈까스를 먹었다. 당연히 만수는 본인 접시의 돈까스를 먼저 썰어 정숙에게 내주었다. 동료의 동료 조언이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돈까스 한접시 행복이 끝날 무렵, 만수는 현실로 돌아와 힘든 결정을 통보했다.
“정숙씨, 저 2년만 월남 다녀오겠습니다.”
정숙은 깜짝 놀랐다.
“월남이요? 그렇게 위험한 곳을 왜 가려고요? 설마 돈 때문에 그러세요?”
“네. 맞습니다. 월남에 2년 다녀오면 서울 변두리에 집 한칸은 마련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정숙씨가 나같이 못난 놈이랑 결혼하는데 집도 한 칸 없이 결혼하는게 너무 마음에 걸려 어렵게 내린 결정입니다. 2년만 기다려주세요.”
“2년간 기다리는 거는 일도 아니예요. 다만 만수씨가 위험해질까봐 걱정되는 거 뿐이지요. 만수씨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자는 사글세 방에서 시작해도 전혀 상관 없어요.” 정숙은 결국 만수의 고집을 꺽을 수 없었다.
만수는 정숙의 확답을 받고 월남으로 갔다. 2년간 정숙은 대전의 한 국수집에서 열심히 국수를 말며 만수를 기다렸다. 만수는 월남에서 착실히 명령에 따랐다. 작전에 투입되었고, 미군의 뒷치닥 거리를 했다. 그렇게 서로를 그리워하는 청춘 남녀는 대전에서 월남에서 각자의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인생이란 그렇게 평탄할 수 만은 없는 법. 하필 인생 비非평탄의 법칙이 만수의 파병 기간에 덮쳤다.
바로 고엽제 살포 작전에 투입된 것이다. 당시 미군은 월남군의 게릴라 전술로 애를 먹고 있었다. 특히 울창한 정글에서 벌어지는 국소 전투에서 승률이 너무 낮았고 미군의 피해도 엄청났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듯 미군의 결정은 잔인했다. 바로 고엽제를 살포하여 월남 정글의 오래된 거목들을 강제 고사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미군은 고엽제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만한 한국군에 고엽제 살포 작업 지시를 하였고, 만수에게까지 임무가 부여되었다. 당시 만수는 고엽제가 본인의 인생과 정숙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고엽제 살포 작업은 전투에 나가지 않아 한국군에서도 선호하는 작업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3개월간 고엽제 살포 작업에 만수는 투입되었고, 그저 열심히 작업에 임했다. 공로를 인정받은 만수는 미군으로부터 표창도 받았다.
표창을 받은 만수는 너무나 감격스러운 나머지 눈물을 글썽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꼭 정숙에게 자랑을 하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들에게도 가보로 대대손손 물려 주겠노라고 다짐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만수에게는 인생에서 몇 안되는 자랑스러운 기억이었다. 2년 간의 파병 기간을 마친 만수는 제법 큰 돈을 모아 제대했고, 약속대로 정숙과 결혼했다. 김포 쪽에 신혼집도 장만하였다.
만수와 정숙은 작은 행복의 꿈에 부풀었다. 작은 행복을 굴려 큰 행복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집안마다 애들이 2~3명 정도는 있었다. 아이들의 밥그릇은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다는 옛말이 풍문으로 돌던 시기였다. 정숙과 만수 부부도 자연스레 아기를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몇 년이 걸려도 쉽게 아기가 들어서지 않았다. 당시에는 무지했기 때문에 불임의 원인을 여자탓으로만 여겼다. 그래서 정숙은 만수에게 미안했고, 시댁에 죄송해했다.
결혼 5년 만에 정숙은 임신을 했다. 집안의 경사였고, 만수는 살면서 처음으로 먹지 않아도 배부르는 감정을 느꼈던 시기였다. 하지만 임신 8개월 차에 정숙은 유산을 했다. 흘러내리는 피와 함께 첫 아이는 흔적도 없이 흘러가버렸다. 정숙은 또 만수에게 미안했고, 시댁에 죄송해했다.
이듬해 정숙은 힘들게 다시 임신을 했다. 첫 아이를 유산했던 경험이 있던 터라 극도로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정숙은 조산기를 느꼈고 9개월만에 아기가 태어났다. 태어난 아기는 작았고, 잔병치레가 많았다. 정숙과 만수의 정성 어린 보살핌아래 아기는 돌을 넘길 수 있었다. 돌까지 잘 넘겼기에 무탈하리라 생각했던 정숙부부의 예상과는 다르게 아기는 계속 아팠다. 아기는 잘 먹지 못했으며, 먹은 것 또한 금새 게워내느라 바빴다.
얼굴은 항상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아기는 끊임없이 울었다. 문제는 원인을 알 수 없어서 정숙 부부는 더욱 답답했다. 전국의 유명한 소문난 병원과 한의원을 찾아다녔지만 소용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다시 전국의 유명한 무당을 찾아다녔고 수차례 굿판을 벌렸다. 하지만 아기는 굿판에서도 벌건 얼굴로 악을 쓰며 울 뿐이었다. 마지막까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채로 아기는 죽었다. 겨우 3살이었다.
정숙 부부는 아팠다. 특히 아기의 웃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더 절망했다. 아기는 짧은 생애에 많이 아팠고 또 울었다. 그래서 부부는 아기의 웃는 얼굴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기를 보내고, 정신을 차려보니 정숙 부부의 수중에 남은 재산은 없었다. 원인 모를 아기의 병을 치료하느라 결국 집도 팔아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정숙 부부는 부산으로 내려왔고, 정숙은 국수 가게에 취직했으며 만수는 작은 주물 공장에 취직했다.
부부는 서로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아기를 갖지 않겠노라 은연 중에 합의했다. 세상을 떠나 보낸 두 아가의 잔상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생의 굴곡 법칙은 불쑥 이어지는 법. 바로 정숙이 세번째 임신을 했고, 열 달 만에 정상적으로 여자 아기가 태어났다. 정숙 부부는 아기의 이름을 미주로 지었다. 미주美珠. 아름다울미, 구슬주. 귀하디귀한 만수와 정숙의 보석.
다행스럽게도 미주는 큰 잔병치레 없이 잘 컸다. 정숙 부부는 그저 감사하며 열심히 미주를 키웠다. 하지만 인생은 또 정숙 부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른 나이에 만수의 등이 굽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미주가 잘 자라면 잘 자랄수록 만수의 등은 점점 더 굽어졌다. 뒤늦게 만수는 월남 파병 동기로부터 고엽제 부작용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만수와 같이 허망하게 자식을 잃은 파병 군인들이 많았고, 만수처럼 직접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았다. 후유증도 각양각색으로 등이 굽는 사람, 다리가 휘는 사람, 피부가 타듯이 온 몸이 간지러운 사람 등 현대 의학이 밝히지 못하는 고엽제 후유증의 가지수만 해도 10종이 넘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단호했고, 한국 정부는 무능했다. 고엽제와 후유증의 인과 관계를 증명할 수 없어, 보상할 수도 없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등이 굽어 곱추와 얼추 비슷해진 만수는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했고, 제대로 된 일자리도 구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렵게 어렵게 얻은 소중한 자식인 미주에게 가난을 되물림했다. 정숙이 국수가게에서 버는 돈으로는 감히 가난의 되물림을 막을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