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마치 주문처럼 매일 저녁 반복되었습니다. 구매팀장이라는 직책을 달고 있는 마흔 살의 제가, 그 말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거절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술자리를 좋아하는 꼰대 상사라는 타이틀이 마음 한편에서는 그리 불편하지만은 않았으니까요.
매일 밤 술잔을 기울이며 살아온 지난 3년. '회식'이라는 그럴듯한 변명으로 포장해 온 저의 일상이었습니다. 한 주에 일곱 번, 그것도 과하게 마시는 날들이 쌓여갔습니다. 아내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고, 36개월 된 아이는 인상을 찌푸렸지만(혹은 제가 그렇게 느꼈지만), 저는 귀를 막았습니다. 직장인의 삶이 다 그렇지 않냐며, 세상 모든 것을 핑계 삼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11월의 건강검진 결과지가 날아왔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비명횡사할 수도 있다'는 경고는, 마흔 살의 저에게 날아온 인생의 옐로카드였습니다. 수치들은 모두 빨간색이었습니다. 간 수치, 콜레스테롤, 중성지방... 심지어 혈압까지. 의사 선생님은 더 이상 농담하듯 "술 좀 줄이세요"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이대로라면 머지 않아 약 드셔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12월 초, 운명처럼 저는 알코올에 취약한 60대 남성들의 참혹한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붙드는 그분들의 모습, 혀 꼬인 소리로 중얼거리는 말투, 그리고 무엇보다 공허한 눈빛. 그분들의 모습 속에서 20년 후의 제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그제야 저는 결심했습니다. 술을 끊고, 다이어트를 시작하기로. 아니, 적어도 제가 좋아서 마시는 술만이라도 끊기로 말입니다.
매년 이맘때면 으레 하던 새해 결심이 떠올랐습니다. 목욕탕 탕 속에서 저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매년 새해마다 했던 결심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지요. 100권의 책을 읽겠다는 결심, 10kg을 빼겠다는 결심, 글을 쓰겠다는 결심... 10살 때부터 시작된 이 새해 결심의 역사는 어느새 30년이 되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었습니다. 마치 새해 첫날의 해돋이처럼 화려하게 시작했다가, 구름에 가려 사라지는 태양처럼 흐릿해져 버리곤 했습니다.
탕 속에서 문득 예전에 화를 다스리기 위해 공부하던 때가 떠올랐지요. 그때 읽었던 철학자 셰네카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격정은 이성을 덮어버리는 안개와 같다" 이 문장이 지금의 저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매년 새해마다 저는 격정 상태에서 결심을 했더군요. 새해라는 특별한 순간, 모두가 결심하는 그 분위기 속에서 저도 모르게 들뜬 마음으로 거창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격정이 사라지자마자, 결심은 안개처럼 흩어졌지요. 이것이 바로 제가 30년간 반복해 온 실패의 패턴이었습니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유레카'를 외쳤다면, 저는 일부러 조용히 했습니다. 격정을 경계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결심할 때마다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떠들어 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탕에서 나와 평소처럼 샤워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저는 조용히 실천을 시작했습니다. 저희 집이 위치한 12층까지 계단을 오르기로 한 것이지요.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숨이 가빠왔습니다. 5층쯤 되었을 때는 다리가 후들거렸고, 8층에서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평온했습니다. 새해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거창한 선언도 하지 않았지요. 그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조용히 시작했을 뿐입니다.
12층에 도착했을 때, 다 늙은 얼굴에 오랜만에 홍조가 돌았습니다. 힘들어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한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도 이 계단을 오르리라 다짐했습니다. 술자리가 있더라도 한 잔으로 끝내리라 맹세했지요. 거창한 계획 대신 작은 실천을, 화려한 선언 대신 조용한 행동을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다를 것 같습니다. 격정이 아닌 이성이, 거창한 선언이 아닌 소소한 실천이, 새해가 아닌 바로 지금이 제 변화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