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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그다드Cafe Jan 06. 2025

대기업에서 배운 것들

이가 썩어가도 말할 수 없었던 아이

예전에 L기업과 S기업 다닐 때는 '조직문화'팀이 따로 있어서 유익한 정보들을 많이 전달해 주곤 했습니다. 당시에는 어떤 소중한 정보가 있어도 당연시하거나 살짝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소기업으로 이직하니 그런 것들은 당연한 게 아니더군요. 물론 중소기업으로 이직하여 개인적으로는 의사결정이 빠르고 업무 자율성이 높다는 장점도 많지만, 일 외적으로 자극을 주는 조직은 회사에 없습니다. 중소기업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겠지만, 직접적으로 생산에 기여하는 조직이 아니면 여유를 둘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직에서 '심리적 안전감'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L기업 다닐 때 '조직문화'팀에서 한창 슬로건으로 홍보한 문구입니다. 심리적 안정감(내면적으로 느끼는 정서적 평온함)과는 뜻이 다릅니다. 심리적 안전감은 개인이 속한 집단에서 자신의 의견과 요구사항을 자유롭게 개진하더라도 비난받지 않을 것이라는 심리 상태를 의미합니다.


제가 지금 중소기업에서 '전략구매투자해외사업지원인사총무물류대외협력팀'장을 맡고 있다 보니 가끔씩 이 용어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왜냐하면 저도 팀장이긴 하지만, 위에다가 보고하거나 의견을 개진할 때 상위 직급의 사람에게 바라는 점이 있는데, 그게 딱 한마디로 표현하면 '심리적 안전감'입니다. 예전 L기업 다닐 때 그 개념을 배웠기 때문에 제가 막연하게 바라는 점을 언어로 구체화할 수 있었죠.


언어로 구체화되다 보니, 제가 바라는 바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상사에게는 제가 보고할 때 심리적 안전감을 느끼고, 저의 팀원들이 저에게 보고할 때는 팀원들이 심리적 안전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이게 언어로 구체화된다고 해서 제가 팀원들에게 완벽한 심리적 안전감을 만들어주지는 못합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른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가 상사에게 바랄 때는 쉬웠으나 막상 제가 팀장 입장이 되어 후배와 팀원에게는 잘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저도 15년 동안 회사생활을 하면서 많은 직장 상사를 만났는데, 편하게 보고하고 책임을 져주는 직장 상사를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제가 겪은 대부분의 상사들은 실수에 대해 질책하기 바빴고, 팀원들의 의견을 경청하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데 집중했습니다. 어떤 상사는 보고를 할 때마다 트집을 잡아 수정을 요구했고, 또 어떤 상사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팀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어떻게 심리적 안전감을 주는 상사가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이죠. 좋은 상사의 모습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요.


두 번째는, 저의 성장 환경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제가 9살 때 부모님이 이혼을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동생과 함께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이혼 후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안 그래도 가정 형편이 좋지 못했는데, 부모님이 이혼까지 하다 보니 가정 형편은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인 15년 전에는 무상급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달은 급식비도 걱정을 해야 했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나름대로 열심히 사셨지만 그리 수완이 좋은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년 시절 내내 안정감과 안전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홀아버지 밑에서 치아도 관리가 잘되지 않았는데, 이가 썩어가도 아버지께 편하게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며 겨우 돈을 모아 치과 치료를 받았고 수백만 원이 깨졌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10여 년 전 치과 치료를 대대적으로 하고 나서는 치아에 돈 들어갈 일이 거의 없습니다. 스케일링과 정기 검진을 하는 정도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돌아보니, 제가 그토록 갈망했던 '심리적 안전감'을 다른 이들에게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 아프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깨달음이 새로운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희망도 생깁니다. 제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먼저 실천하는 것이 성장입니다.


회사에서는 후배들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팀장이 되고 싶습니다. 실수를 질책하기보다는 함께 해결책을 찾아가는 선배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정에서는 아이가 어떤 이야기든 편하게 할 수 있는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이가 아파도, 성적이 떨어져도, 친구와 다퉈도 '아빠한테 말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그런 아버지 말입니다.


결국 심리적 안전감이란,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와 이해에서 시작됩니다. 저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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