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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그다드Cafe Jun 30. 2024

PPT 귀신

to. 잘파세대에게

얼마 전에 우리나라 제1의 자동차 회사로 이직한 B후배를 만났다. 그 B에게 물었다.


"B야. 좋은 회사가서 자동차도 할인 받고 좋겠다."


B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형. 월급쟁이 똑같습니다. 그냥 AT345예요."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내가 당황하며 물었다.


"머? AT? 345? 369?"


B는 '이 형 머지?'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형!!! 꼰대처럼 왜그래. 어차피 월급 세후(After Tax) 3백 4백 5백이잖아요!!”


나는 시무룩해져 대답했다.


"야, 그렇게 월급 받는 대한민국 노동자가 몇이나 되냐. 너희 회사는 월급 특히 많이 주는거야..."


B는 대답하지 않았다. 불만이 많지만 그래도 경력 대비 대한민국 최고의 수준 월급을 받는 자의 여유로움이랄까 그런 것이 느껴졌다. 나는 끝까지 흡집을 찾겠노라 집요하게 물었다. (부러워서 그런건 절대 아니다)


"B야, 넌 회사 생활에서 제일 불만족스러운게 머니?"


B는 바로 뱉었다. 회사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을.


"형. 이놈이 회사는… 피피티에 너무 진심이야."


나는 올 것이 왔다는 기분으로, 바로 물었다.


"왜 그래. 인마. 머야. 머야. 형한테 다 말해봐."


B는 바로 대답했다.


"형. 피피티에서 육각형 모양으로 색깔 정하는 기능 있는줄 알아?"


"당연히 모르지."


B는 한숨을 푹쉬며, 마이크로소프트 사에서 개발한 파워포인트의 육각형 색깔 구분 기능에 얽힌 설명과 에피소드를 얘기해주었다. 하지만 정말 별 거 아닌 관계로 대충 요약하면, B가 속한 부서에서는 피피티의 글자색을 정할 때, '뻘건색', '파란색', '노란색' 이정도 수준이 아니라, 색상 팔레트(앞서 말한 그 육각형)에서 세부적인 색을 선택한다는 하소연이었다. 결론은 쓸데없는 보고가 너무 많아서 자주, 너무 자주, 현타가 온다는 결론이었다.


B 얘기를 듣자니,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나의 Ex들이 생각났다.


내가 전전직장(대기업 계열의 상사)과 전직장(S기업 계열의 배터리 회사)을 그만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피피티와 보고 문화에 지쳤기 때문이다. 전전직장에서 사원/대리 시절 때는 끝없는 보고 문화에 대해, 아예 비판 의식이 없었으나, 10년차쯤 되었을 때 쓸데없는 보고에 지쳐갔다.


그 즈음 (이미지가 괜찮은) S기업에서 공고를 냈고, 나는 이직을 결심했다. 물론, 전적으로 보고 문화 때문에 전전직장에서 전직장으로 이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 외부에서 보는 S기업은 오픈 이노베이션, (우리말로는 합리적인 기업 문화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을 잘 정착시킨 회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왠걸...


'쓰레기차 피하려다 똥차를 만났다.'


S기업은 참 좋은 회사였다. 급여, 복지도 훌륭했고, 무엇보다 회사밥이 너무 맛있었다. 이직 초반에는 매번 급식 사진을 찍어 아내한테 보내주면, 아내는 매번 부럽다며 '쌍따봉'을 날렸드랬다.


하지만 그놈의 피피티와 보고가 문제였다. 당시 나의 상사 W는 조금 답답하긴 해도, 괜찮은 분이었는데 보고 장표(피피티)에 정말 진심인 사람이었다. 가령, 내 기준으로 5분이면 구두로 보고 가능한 사안을 몇 시간을 들여 피피티 한 장에 담으려 최선을 다했다.

아직도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 날이 있다. (아아... 어찌하여 그 날을 잊으랴) 보고할 사안이 있었는데, 오전 일찍 30분 정도 피피티를 만들어 나의 상사 W에게 보여주었다.


W는 별 코멘트 없이 나보고 시간 있냐며 같이 피피티를 수정하자고 했다. 나는 당연히 알겠다고 하고는, 둘이서 작은 회의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 6시간 정도 한장 짜리 피피티를 수정했드랬다. 중요한 아이디어가 오갔던 건 6분도 채 안되고, 칸 조정, 글자 사이 간격, 단어의 적합성(W는 이를 '윗분'들이 많이 쓰는 용어라고 표현했다) 등등 내 기준으로는 정말 쓸데없는 일로 보여졌다.


그리고는 나에게 수고했다며 저녁으로 술을 사겠다고 했다. (물론, 법인카드로) 다음 날, 아침 나는 맨정신에 내가 처음 만든 1장짜리 피피티와 6시간 동안 시간과 정신의 방에서 수정한 1장짜리 피피티 베타버젼을 비교해 보았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 눈에는 달라진 게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충격을 받은 나를 보며 또 충격을 받았다. 6시간이나 두 명이서 수정했는데도 달라진 걸 발견하지 못했다면 내가 미친 것이고, 진짜 달라진 게 없다면 나는 이직을 잘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나는, S기업 중간 지주사의 계열사 회사와 협업할 기회가 있었는데, 장표와 피피티, 보고에 정말 진심인 것은 똑같음을 보았다. 나는 크게 실망했고, 결국 쓰레기차를 피해 똥차를 선택한 나를 책망했다.


나는 가끔씩 전직장의 블라인드에 들어가서 게시판을 훔쳐본다. (전직장 메일로 가입한 블라인드를 탈퇴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심리인지는 모르겠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대한 미련인지... 아니면 나의 선택에 대한 정당성을 애써 찾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보고에 집착하고, 장표에 집작하는 문화가 여전함에는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전직장의 블라인드 게시판에서 보고 문화를 성토하며 쓴 글. 그들의 빡침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나는 AI에는 잼병이고, 그 좋다는 엔비디아(최근 몇 달새에 주가가 폭등하여 전세계 시총 1등 자리를 놓고 마소와 치열한 경쟁 중)주식도 사지 않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보고를 위한 피피티 장표에 집착하는 류의 회사원들은 곧 경쟁력을 상실할 것이라 굳게 믿는다. 이미 상실했지만,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붙들고 있을 것이 없기 때문에.


요즘도 나는 가끔씩 전직장의 W와 6시간 동안 2평 남짓한 공간에서 1장짜리 피피티를 수정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To. 잘파세대에게. 걱정하지 마시라.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이고 아무 의미도 없는 보고 장표 잘 만들어서 위에다 잘 보이는 시대와 방식은 곧 사라질 것입니다. 당신들이 지금 옳다고 생각하는 그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가 올 것입니다. 이미 왔을 수도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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