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직장인에게 술이란?
직장인 3대 허언이라는 짤을 인터넷에서 읽었습니다.
내일부터 술 끊는다.
내일부터 다이어트한다.
내일부터 공부한다.
오늘은, 3대 허언 중 콕 짚어 ‘내일부터 술 끊는다’가 대한민국 직장인에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유에 대한 고뇌입니다.
이 말을 하지 않은 직장인이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겁니다. 마치 신년 결심처럼, 우리는 숙취에 시달리면서 아침마다 변기를 붙잡고 이 다짐을 되풀이합니다. 하지만 왜 대한민국 직장인에게 이 간단한(?) 다짐이 그토록 실현 불가능한 미션이 되는 걸까요?
1. "한잔만 더"의 대한민국 직장 문화
대한민국 직장 문화에서 '술'은 단순한 음료가 아닙니다. 그것은 의사소통의 도구이자, 팀워크의 촉매제이며, 때로는 승진의 지름길입니다. "김대리, 한잔만 더 받게!"라는 상무님의 점잖은 권유를 거절할 수 있는 김대리는 몇이나 될까요?
회식 자리에서 술을 거절하는 것은 마치 회의 중에 상사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만큼이나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특히 위계질서가 뚜렷한 한국 직장에서 "저는 안 마시겠습니다"라는 말은 때로 "저는 이 팀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2. "오늘만 특별히" 신드롬
월요일에 "이번 주는 금주다!"라고 다짐한 당신, 화요일에 거래처에서 연락이 옵니다.
"중요한 계약 성사됐어요! 오늘 저녁에 회식 어때요?"
'예외'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생일, 승진, 입사, 퇴사, 계약 성사, 프로젝트 시작, 프로젝트 1차 중간점검, 프로젝트 2차 중간점검, 프로젝트 종료... 축하할 일이 없으면 위로할 일이 생깁니다. 프로젝트 실패, 거래 무산, 야근, 월요병, 오늘은 금요일 같은 수요일이라는 사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자기 정당화 편향'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뇌는 원칙을 깨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놀라운 창의력을 발휘합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네트워킹도 일의 일부니까", "한 잔은 술도 아니지"... 우리의 뇌는 예외를 만드는 데 천재적입니다.
3. "스트레스 해소제"로서의 술
대한민국 직장인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갈까요?
새벽 6시, 알람이 울립니다. 출근길 지옥철. 끝없는 회의. 상사의 갑질. 불합리한 업무 지시. 처리할 수 없는 업무량. 야근. 집에 도착하면 이미 자정...
이런 일상에서 술은 종종 유일한 탈출구처럼 느껴집니다. 스트레스라는 무거운 배낭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허락된 시간입니다. 맥주 한 모금에 오늘의 실수가 녹아내리고, 소주 한 잔에 팀장의 꾸중이 희석됩니다.
특히 재미있는 점은, 술에 취하면 걱정이 줄어듭니다. 내일 아침에 중요한 발표가 있더라도, 취하면 그런 걱정은 잠시 사라집니다. 물론 숙취와 함께 더 큰 공포로 돌아오겠지만, 그건 '내일의 나’께서 책임질 것입니다.
4. "혼술의 유혹"
"회식은 정말 싫어. 그냥 집에서 혼자 마시는 게 좋아."
술을 끊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혼술'이라는 현대적 음주 문화의 등장입니다. 과거에는 술자리가 사회적 의무였다면, 이제는 개인적 취미가 되었습니다. 넷플릭스를 보며 마시는 와인 한 잔, 게임을 하며 마시는 맥주 한 캔은 소소한 행복이자 나만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힘든 하루를 버틴 자신에게 주는 작은 선물로서, 술은 때로 우리의 정서적 회복력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 '보상'이 습관이 되면, 보상 없는 하루는 불완전하게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오늘 야근했으니까 맥주 한 캔 정도는 괜찮겠지?"
"이번 주 너무 힘들었어. 오늘은 소주 한 병 마셔야겠다."
"주말인데 뭐, 살짝 취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예외는 일상이 되고, 술은 삶의 필수품이 됩니다.
5. "내일부터"의 마법의 말
"내일부터 술 끊는다"라는 말에는 묘한 안도감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마음껏 마셔도 된다는 허락이자, 동시에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책임감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나"는 술을 마시고 즐기고, 모든 책임과 고통은 "미래의 나"에게 미룹니다. 물론 내일이 되면 그 "미래의 나"는 또다시 "현재의 나"가 되어 같은 패턴을 반복합니다.
가장 재미있는 점은 "내일부터"라는 말이 갖는 무한한 갱신 가능성입니다. 오늘 실패했다고 해서 영원히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내일이라는 새로운 기회는 항상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오늘부터 술 끊는다"가 아닌 "내일부터 술 끊는다"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항상 예외니까요.
6. 직장 생활의 의례로서의 술
한국 직장 문화에서 술자리는 단순한 음주의 장소가 아닌, 중요한 사회적 의례입니다. 회식은 공식적인 회의에서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풀어내는 자리이고, 접대는 비즈니스 관계를 공고히 하는 과정입니다.
"이번 프로젝트 성공하면 제가 한턱 쏩니다!"
"거래처 미팅 후에 간단히 저녁 먹으면서 얘기 나눠요."
"팀 회식 불참은 연차 쓰는 것보다 눈치 보여..."
이런 문화에서 술을 완전히 끊는다는 것은 단순히 음료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직장 생활의 중요한 의례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는 결정이 됩니다.
결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부터 술 끊겠습니다
대한민국 직장인에게 "술 끊기"가 어려운 이유는 단순히 의지력 부족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적 압력, 스트레스 관리 전략의 부재, 자기 정당화 메커니즘, 그리고 깊이 뿌리내린 문화적 관행의 복합적 결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간 수치가 점점 높아지고, 체중계의 숫자도 함께 올라가는 것을. 그리고 아침마다 두통과 함께 찾아오는 후회도.
그래서 오늘도 다짐합니다.
"진짜 진짜 내일부터는 술 끊는다!“
... 아, 근데 내일 상무님 생일이네? (이미 캘박 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