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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람과 통화하다가, 중국말이 튀어나왔다

你可以…

by 바그다드Cafe

며칠 전, 회사 중국 법인의 조선족 YK 과장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YK 과장님은 평소에도 업무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분입니다. 출장 갈 때 가끔 저녁에 빼갈 한두 잔 기울이며 세상 사는 얘기를 나누는 그런 ‘해외 동지’ 같은 존재입니다.


그날도 평소처럼 업무 관련 보고를 주고받다가, 순간 제 입에서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습니다.


“你可以打电话xxx公司吧?” (과장님, xxx 회사에 전화해 주실 수 있나요?)


……어? 나 지금, 중국말했네?


순간 저도 모르게 멈칫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건데, 알고 보니 중국어였던 겁니다. 그것도 꽤 정확하게 말이죠. 그 찰나의 순간에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이랬습니다.


‘이게 다… 퇴근 후 30분 때문이다.’


퇴근 후 30분, 내가 쌓아 올린 작은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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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지난 6개월 동안 별 거 아닌 것 같은 공부를 했습니다. 출근길엔 중국어 회화 앱을 듣고, 퇴근 후엔 간단한 문장 몇 개 따라 말해보고, 중국 드라마는 무리하게 자막 없이 봤다가 그냥 다시 자막 켜기를 반복했습니다.


단어를 외운다기보단, 그냥 ‘중국어에 노출되는 시간’을 늘렸던 거죠. 하루 30분. 많아봐야 1시간.

처음엔 별 변화가 없었습니다. 말이 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성조는 갈수록 이상해지고, ‘중국어 공부한다고 했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민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무도 모르게 그 시간이 쌓여 문장 하나로 ‘튀어나온’ 겁니다.


심리학자 제임스 클리어는 <Atomic Habits>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은 일상적인 습관의 결과다. 우리의 삶은 한순간의 변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과는 그동안의 습관이 쌓인 것이다. 순자산은 그동안의 경제적 습관이 쌓인 결과다. 몸무게는 그동안의 식습관이 쌓인 결과이고, 지식은 그동안의 학습 습관이 쌓인 결과다. 방 안의 잡동사니들은 그동안의 청소 습관이 쌓인 결과다. 우리는 우리가 반복했던 일의 결과를 얻는다.


그동안의 노력은 ‘1도’씩만 올라가는 것 같았지만, 그동안의 공부가 말 한 줄로 변해서, 얼음이 녹아내린 순간이었습니다.


사소한 습관의 심리학


심리학에서는 이를 ‘점진적 강화(gradual reinforcement)’라고 부릅니다. 즉, 아주 작은 행동을 반복하면 뇌는 그 과정을 ‘익숙한 루틴’으로 받아들이고, 어느 순간 자동화된 반응처럼 작동하게 된다는 원리입니다. 말 그대로, 습관이 뇌를 다시 프로그램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동화는 심리적 저항을 줄입니다.


공부를 시작할 때 ‘아, 귀찮아…’라는 생각이 들던 것도 습관이 되면 ‘딱 10분만 하고 자자’로 바뀌고, 그게 20분, 30분으로 늘어나는 순간, 학습은 자연스럽게 체화됩니다. 저 역시 그런 점진적 과정을 거쳐왔던 겁니다. 말은 안 늘어난 것 같아도, 제 귀와 입은 차곡차곡 ‘중국어 회로’를 만들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YK 과장님과의 전화 통화는, 그 회로가 작동한 첫날이었습니다.


티 나지 않는 시간이 언젠가 티가 난다


중국어는 그 자체로는 제 일에 꼭 필요한 스킬은 아닙니다. 통역 앱도 있고, 메일은 자동 번역도 되고, 대부분의 회의는 한국어와 영어로 진행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도 퇴근 후 30분을 씁니다. 말이 늘지 않아도, 단어가 안 외워져도, 그 시간이 언젠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거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쌓인 시간은 어느 날 갑자기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순간을 만듭니다. 말 한 줄이든, 아이디어 하나든, 혹은 뜻밖의 인정이든. 중요한 건 그 순간을 위해 매일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퇴근 후의 30분이 내 커리어의 ‘깜짝 이벤트’를 만드는지, 아니면 ‘아무 일도 없는 루틴’이 되는지는 결국 내가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我可以…


오늘도 퇴근 후 30분, 이어폰을 꽂고 중국어를 듣습니다. 어쩌면 또 누군가와의 통화 중, 또 한 문장이 툭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그게 또 하나의 자신감을 심어줄지도요. 말이란 건, 결국 쌓여서 나온다는 걸 저는 이제 조금씩, 말로 증명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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