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 달에 한 번, 회의 중에 퇴사 결심

왜 매번 결심하고, 매번 돌아오는가

by 바그다드Cafe

회의 중이었습니다. 한참을 말없이 듣고 있다가,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못 해 먹겠다.”

“이번 달까지만 하고 나가자.”

“이건 아니지 않나.”


사실 익숙한 패턴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꼭 이런 결심을 합니다. 대개는 회의 중입니다. 어디서 터질지 모를 말폭탄과,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 그리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도 잊게 만드는 불필요한 논의들 때문입니다.


그럴 때면 온몸에서 퇴사 호르몬이 미친 듯이 분비됩니다. 심장은 뛰고, 손끝은 사직서를 가리킵니다. 회의실 시계는 멈춘 것처럼 느리게 가고, 눈앞의 노트북 화면은 흐려집니다.


왜 이 자리에서 이런 말들을 듣고 있어야 하나,

왜 내가 매번 이 역할을 맡아야 하나,

왜 저 말에 아무도 아무런 말도 안 하는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회의가 끝나면 마음이 좀 가라앉습니다. 퇴사를 결심했던 사람은 어디 가고, 다시 자료를 정리하고, 이메일 회신을 쓰는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회의 중에 그렇게 뜨겁던 마음이, 회의가 끝나고 10분만 지나면 냉장고에 넣은 물처럼 식어버립니다.


그렇게 사직서 대신 퇴근 후 라면을 끓이고, 링크드인 대신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이북을 켭니다. 새로 본 채용공고는 ‘마음만 저장’ 폴더에 던져두고, 내일 해야 할 할 일 목록만 새로 업데이트합니다.


회의 중에만 반짝 결심하고, 회의가 끝나면 다시 평소대로 돌아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이건 ‘감정’과 ‘현실’ 사이의 간극일 겁니다. 회의 중엔 감정이 앞섭니다. 기대, 피로, 실망, 분노 같은 것들이 겹쳐지면 ‘이 일을 왜 이곳에서 하지?’라는 질문이 고개를 듭니다. 회의실 안에서의 60분은, 온갖 감정이 압축된 고압 용기 같아서 그 안에서만큼은 진심으로 이 회사를 그만두고 싶습니다.


하지만 회의가 끝나면 현실이 돌아옵니다. 급여일, 대출 상환일, 진행 중인 프로젝트, 그리고 인생 5년 차 아들까지. 내가 여기서 빠지면 안 되는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모든 감정 위에 천천히 다시 쌓입니다.


거기엔 자존심도, 책임감도, 약간의 체념도 섞여 있습니다. 결국 다시 컴퓨터를 켜고, 다음 회의 일정을 확인합니다. 이직 사이트는 끄고, 메신저에서 후배의 질문에 답을 보냅니다.


그렇게 퇴사 결심은 매번 반납되고, 또 다음 달 회의를 기다립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다음 달엔 진짜 사직서를 낼지.


하지만 대부분은 압니다. 우리는 그렇게 쉽게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잠깐씩 부서지고 다시 조립하며 오늘도 그럭저럭 하루를 채웁니다.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으니까 버티는 거예요.”

“진짜 한계가 오면 알아서 나가게 돼요.”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꼭 한계까지 가야만 떠나야 하는 걸까요?


혹시 지금도 회의 중에 ‘진짜 이번엔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이 말만은 드리고 싶습니다.


그 결심이 틀린 건 아닙니다. 다만, 감정보다 책임이 크고, 현실이 조금 더 무겁다는 걸 우리는 본능처럼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출근해서, 회의하고, 퇴사 결심했다가 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일합니다. 그 반복 속에서도 나만의 호흡을 찾아 조금씩 버티는 법을 익혀가고 있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