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크기는 별상관없다
대기업에서 12년을 뒤로하고 중소기업으로 이직한 초반, 스스로 꽤 당황스러웠습니다. 나름 대기업에서 10년 넘게 일했고, 꽤 다양한 부서와 사람을 거치며 실력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중소기업에 오니 익숙하던 방식이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보고서를 꼼꼼히 정리해도 “그냥 말로 해요”라는 반응이 돌아왔고, 사전에 일정을 정리해서 공유하면 “아직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라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한동안은, 내가 과했던 건가? 이게 괜한 오지랖인가?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가진 대기업식 업무 습관은 단점도 있었지만, 분명히 쓸모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조금 손질이 필요했습니다. 말하자면, 대기업 DNA를 중소기업 환경에 맞게 커스터마이징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체감한 건 일의 속도와 중심이 달라졌다는 점이었습니다. 대기업에서는 보고 체계도 탄탄하고, 대부분의 업무가 문서로 남습니다. 미팅도 많고, 프로세스를 중심으로 굴러가다 보니 누가 무엇을 해야 할지 비교적 명확했습니다.
그에 비해 중소기업은 프로세스보다는 사람 중심입니다. 회의를 잡기보다는 그냥 지나가다 한마디 툭 던지고 결정되기도 하고, 누가 뭘 언제까지 할지는 정해져 있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대신, 일단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판을 짭니다. 그게 중소기업의 속도이자 매력입니다.
그래서 전, 대기업에서 익힌 습관 중 몇 가지만 남기고 나머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보고서는 꼭 필요할 때만, 대신 핵심만 간단하게 정리해서 구두로 먼저 공유하고 나중에 자료화하는 방식으로 바꿨습니다.
기획안이나 일정표도 ‘완벽’보다 ‘빠르게’ 전달하는 걸 우선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꼭 문서로 정리해야 할까?”를 매번 자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덕분에 시간은 훨씬 줄었고, 동료들과의 소통도 훨씬 효율적으로 변했습니다.
반대로, 대기업에서 배운 숫자 감각과 일의 우선순위 설정은 큰 도움이 됐습니다. 대기업은 수치 중심의 사고가 체화되어 있어서, 업무 보고를 할 때도 수치나 근거 데이터를 함께 제시하는 게 자연스러웠습니다.
이직한 중소기업에서는 이런 감각이 드물기 때문에, 회의나 제안 자리에서 상대적으로 더 신뢰를 받았습니다. 특히 대표님은 숫자에 훨씬 민감하시더군요. 이익률, 판가, 원가 변화 같은 걸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눈빛이 바뀌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눈치 보는 능력과 사전 대응 습관도 살아남는 데 큰 무기였습니다. 대기업에서는 여러 부서와 조율하며 자연스레 생긴 감각인데, 중소기업에서는 이런 역할을 대신해 줄 부서가 없다 보니 더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언제쯤 일이 몰릴지, 어디서 문제가 생길지 미리 예측하고 움직이는 능력은 규모와 무관하게 빛을 발했습니다. 오히려, 인원이 적은 조직일수록 한 사람이 미리 움직이는 게 더 큰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대기업 DNA를 그대로 고수했다면 지금쯤 조직에서 고립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쓸데없이 꼼꼼한 사람’ 혹은 ‘혼자 유난 떠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저 나름대로 조금씩 조율했습니다. 꼼꼼함은 유지하되 티 내지 않게, 보고는 하되 부담스럽지 않게, 준비는 하되 묻히듯 자연스럽게가 핵심이었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적용한 대기업식 습관들이 지금은 저만의 생존 전략이 됐습니다. 중소기업은 매뉴얼이 약하기 때문에, 내가 가진 도구를 스스로 조립해야 하는 조직입니다. 이직 3년 차가 되니 이제야 이 말의 의미가 조금은 와닿습니다.
대기업 DNA는 무기일 수도, 짐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리고 어느 환경에서든 변하지 않는 진리는 하나였습니다. 사람을 먼저 보고, 흐름을 읽고,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오래 살아남습니다.
그건 기업의 크기와 무관한 진짜 실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