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당신 것이니
소설가 김경욱 님의 소설을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우범곤 총기사건을 모티브로 한 <개와 늑대의 시간>은, 말하자면 ‘압권’입니다. 한국 사회의 어둡고 음습한 비극적인 구석을 파고드는 동시에 인간 내면의 균열까지 들여다보는 날카로운 문장이 돋보였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읽은 작품이 <나라가 당신 것이니>입니다. 이 소설은 냉전 시대의 퇴물 요원, 칠순 노인 ‘라이카’의 마지막 임무를 따라가는 블랙코미디풍의 스릴러입니다.
신문에 자신의 부고가 실리고 그것이 오래전 동료가 보낸 암호문임을 직감한 라이카는 다시 ‘작전’에 투입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작전이 너무 낡았다는 것입니다. 시대는 바뀌었고, 적도 바뀌었으며, 그를 기억하는 이도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굳게 믿습니다. 자신은 ‘나라를 위해’ 아직도 일할 수 있다고. 왜냐고요? 그가 평생 몸담았던 그 나라가 아직도 자기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원이 아닙니다. 회의실에서 PPT를 넘기고, 점심 메뉴에 따라 하루 컨디션이 좌우되는 평범한 회사원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소설이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라이카가 마지막 작전을 수행하겠다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움직일 때 저는 문득 떠올랐습니다.
대기업의 위상을 등에 업고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 회사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 일명〈대기업이 당신 것이니 현상입니다.
대기업은 한때 ‘나라’였습니다. 아니, 나라보다 더 큰 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기업 다니면 인생 성공’이라는 믿음은 70년대생을 지나 80년대생에게까지 내려오는 일종의 국가 종교였습니다. 입사만 하면 부모님 지인들에게 자랑거리가 되고, 연애 시장에서도 한결 당당해졌으며, 무엇보다 스스로 ‘어른이 된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대기업에 들어간 순간, 우리는 사회적 존중, 가족의 칭찬, 안정된 삶, 그 모든 것을 얻은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 뽕은 좀처럼 빠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회사는 그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회사는 언제든 당신을 빼고 재편될 수 있습니다. 기술은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조직은 효율화를 말하며, 후배들은 그 모든 시스템을 ‘구닥다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말합니다.
“내가 이 회사 몇 년인데.”
“예전에는 말이야…”
그 말 끝에는 늘 ‘이 회사는 내 거’라는 믿음이 숨어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이 회사가 나를 알아줄 거라는 기대가 남아 있는 겁니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요? <나라가 당신 것이니> 속 라이카는 분명 과거엔 실력자였습니다. 국가를 위해 기밀을 다뤘고, 명령에 충실했으며, 목숨을 걸고 작전에 투입되던 요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은 무심했고 세상은 이미 그를 지나쳤습니다.
작전 방식은 낡았고, 그의 충성심은 이제 웃음거리로 전락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믿습니다. “나라가 나를 기억할 것이다.” “나는 아직 필요하다.” 직장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종종 봅니다. 특히 과거 대기업 전성기 때 몸에 밴 방식, 의전, 문화, 회의 관성 등을 여전히 고집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후배들이 “그건 요즘 안 합니다”라고 말하면, “내가 다 해봤어, 그거 다 의미 있어”라고 말하는 선배들입니다.
처음에는 자신감처럼 보이던 태도는 어느 순간 ‘자기 세계에 갇힌 확신’으로 굳어지고, ‘내가 회사다’라는 믿음은 ‘회사가 내 거다’라는 착각으로 진화합니다. 하지만 말이죠. 회사는 언제든 바뀝니다. 바뀌어야 살아남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그게 회사의 본능입니다.
반면, 우리는 바뀌지 않으려 합니다. 익숙한 방식과 과거의 영광에 매달리며, 지금의 현실을 부정합니다. 그렇게 회사와 우리의 호흡이 어긋나는 순간, 균열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회사원에게도 ‘작전 종료’는 필요합니다.
‘지금은 내가 중심이 아니다.’
‘예전 방식이 지금도 유효한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다음 단계가 열립니다. 라이카는 끝까지 자신이 여전히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 믿음의 끝에서야 비로소 진실을 마주합니다. 회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기업이 당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순간, 회사 밖의 세계가 보이고, 지금의 나도 보입니다. 더 나은 버전의 내가, 지금부터 새롭게 작전 계획을 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오래 착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회사는 당신 것이 아닙니다.
그건… 나라였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