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직장인의 휴가 풍경
부산으로 휴가를 왔습니다.
한여름의 남쪽 바다, 북적이는 해운대나 휘황한 야경도 좋지만 저는 오늘 저녁, 한 조용한 식당에 앉아 백반을 먹고 있습니다. 앞에는 다섯 살 난 아들이 앉아 있고요.
아내는 근처에서 잠시 지인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은, 저와 아들의 단독 외식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저희 부자(父子)의 첫 번째 백반 회동입니다.
그동안 아이가 너무 어려 이런 식사는 늘 아내의 손길이 있어야 가능했는데 이제는 곧잘 밥도 잘 먹습니다. 고깃집도 아니고, 피자도 아니고, 백반집에서 둘이 밥을 먹는 건 참 어색한 일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한참을 말없이 밥을 먹다, 아이가 묻습니다.
“아빠, 저거는 머야?"
입안 가득 음식을 넣고, '좋은 데이'를 마시는 저에게 아이는 묻습니다. 저는 제대로 대답도 못 하고 그저 웃기만 했습니다. ‘이런 순간을 우리가 공유할 수 있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는 제 답이 없자 혼자 반찬을 살펴보다 계란말이를 발견했습니다. “아빠, 나 이거 좋아해.” 하며 계란말이를 자기 앞으로 당겨놓습니다.
문득 회사에서 점심시간마다 메뉴를 고르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매번 메뉴가 고민이었고, 함께 점심 먹는 사람들의 기분이나 눈치를 보며 메뉴를 고르곤 했는데, 오늘은 그런 긴장도 필요 없습니다. 아이와 먹는 백반 한 상은 복잡한 계산이나 감정 없이 그저 담백했습니다.
휴가라고 해도 어딘가로 도망치듯 떠나거나, 일상을 잊어버리려 애쓰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익숙한 일상에서 조금 벗어난 정도의 이런 밥상이 제겐 충분히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늘 누군가와 일정을 맞추고, 보고서를 조율하고, 기한에 쫓기며 살다 보면 무엇을 먹었는지도 모르는 끼니가 많았습니다. 바빠서 때우듯 먹는 점심, 누군가와 먹고 마시지만 늘 공허한 회식 자리. 그런 음식들이 입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때로는 외롭고 허전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식탁 맞은편에 앉은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밥을 먹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같이’ 밥을 먹는다는 감정이 느껴졌습니다. 복잡한 감정이나 고민 없이도 충만한 순간을 만들어 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아이가 잘 먹는 모습에 제 마음까지 든든해집니다. 아이는 몇 가지 반찬 맛을 보고는, 아빠인 제게 마치 신기한 것을 발견한 듯한 눈빛을 보냅니다. 아이에게 모든 맛은 새롭습니다. 저도 아이 덕분에 익숙했던 백반집 밥상 앞에서 잊고 있었던 새로운 맛을 느껴봅니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는 김을 한 장 더 달라고 했습니다. 마치 디저트를 먹듯이 김 한 장을 마저 먹고는, 물을 한 컵 마셨습니다. 그리고 작은 입으로 “맛있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이번 휴가는 이걸로 충분하다고 느꼈습니다.
남쪽 바다의 바람도 좋지만 오늘 저녁, 백반 한 상 앞에 마주 앉은 이 시간이 저에겐 올해 가장 소중한 풍경이었습니다. 특별한 계획이나 화려한 여행지는 없지만, 삶의 순간들이 오히려 더 짙은 색깔로 가슴에 남는 그런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