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이유는? 퇴사나 이직을 꿈꾸는 이에게 혹시나 기분이 퇴사가 되지 않게 주의를 주기 위함. 나의 대기업 퇴사와 눈물 나는 중견기업 적응기를 널리 널리 알리고자 하기 위함.
우선, 대기업 다니는 사람들의 페이보릿 허세 유형 2가지를 살펴보자. (아, 물론 대기업 다니는 사람이 전부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어떤 유형을 극대화하기 위한 극장치니 미리 양해 구합니다)
첫 번째, 이 놈의 회사! 때려치우고 치킨집이나차려야지.
두 번째, 이 놈의 회사! 여기서나 내가 이 대접을 받지 낮춰서 중견기업으로 가면 더 좋은 대우받을 거야.
첫 번째 질문은 아주 순진한 아이 같은 발상이다. 직접 경험해보지도 않고 말만 앞서는 유형이기 때문이다. 요식업 알바라도 경험해 본 사람은 절대 저런 말 못 한다. 편의점이나 커피 전문점도 마찬가지. 자영업 사장님들 진짜 고생하신다. 만약에 퇴사하고 자영업을 꿈꾸는 K직장인은 제발 먼저 알바부터 경험하고 내가 자영업을 운영할 깜이 되는지 냉정히 분석부터 하자.
아 그리고 이건 슬픈 얘긴데... 우리 부친도 자영업을 쉽게 보다가 쫄딱 망했다. 부친께서 다녔던 부산의 어느 사료 공장이 IMF 영향으로 부도가 났다. (맞다. 나는 IMF때 학창 시절을 보낸 IMF 키즈다) 그때 부친은 호기롭게 렌터카 사업에 뛰어들었다. 25년 전 얘기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왕 카스테라나, 탕후루 가맹점 같은 거 아니었나 싶다. 부친은 있는 돈, 없는 돈, 딸러 빚까지 져서 EF 소나타 두 대를 구입했지만 결국 망했다. 안 그래도 가난한 집이 클라스를 뛰어넘어 더 심각하게 가난해졌다. 렌터카 사업이 망하는 꼴을 안 본 (이미 집나간) 엄마를 그때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샀던 EF 소나타 두 대 중 한 대는, 부친이 인수하고 한 대는 똥값에 팔았다. 나라가 뒤숭숭하던 시기였다. 덩달아 우리 집은 더 뒤숭숭했다. 엄마는 집을 나갔지... 부친은 사업에 망했지... 결국 부친은 경남 김해에 있는 사료 공장에 재취업했다. 덕분에 나도 아주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유년 시절의 충격 덕분에 나는 빚을 무서워한다. 대학 때 반드시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던 형편임에도 온갖 아르바이트와 험한 일을 하며 끝끝내 학자금 빚을 지지 않았다. 대신 휴학 기간이 길었다. 미련해 보일 수도 있지만, 학자금 빚 없이 졸업한 게 그때 나에게는 가장 큰 자랑이었다. 일종의 정신 승리랄까. 제도권에 순응하지 않고 독하게 맞섰다고나 할까. 하지만 요즘은 차라리 학자금 빚을 내고, 비행기표만 장만해서 호주로 양털깍이나 오렌지 따러 갔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후회는 아니다. IMF 키즈의 회고록이다. 정치인들이나 훌륭한 양반들의 회고록에 ~~ 라면 어땠을까?라는 가정이 있지 않나. 나도 벤치마킹 중이다.
두 번째는 중견기업과 중소기업을 다소 우습게 보는 유형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대기업은 뭘까? 중견기업은? 중소기업은? 막연히 대기업은 사람들이 대부분 아는 기업이고, 좀 어디서 들어봤는데라고 하면 중견기업이고, 잘 모르면 중소기업일까? 그러지 말고, 상법을 기준으로 살펴보자.
대기업 정의: 자산 총액이 5조 원 이상인 기업. 또는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속하는 기업.
중견기업 정의: 중소기업과 대기업 사이의 기업으로, 자산 총액이 5조 원 미만이며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속하지 않는 기업. 또는 중소기업에서 성장하여 중소기업 기준을 초과한 기업.
중소기업 정의: 주로 중소기업기본법에 따라 정의되며, 매출액과 종업원 수를 기준으로 구분됨. 예를 들어 제조업의 경우, 종업원 수 300인 이하 또는 매출액 800억 원 이하인 기업.
저 기준에 의하면, 맞다. 나도 대기업을 13년 정도 다니고, 2년 전 중견기업으로 이직했다. 그것도 누구나 알고, 자산 총액이 5조 원 훌쩍 넘는 S대기업에서… (혹시라도 나의 S대기업 퇴사 이유가 궁금하면 아래 링크 참조)
L상사, S기름집 출신인데, 당연히 잘 적응하겠지. (그리고 당연히 ACE로 인정받지 않겠어?)
결론부터 말하면, 난 진짜 지난 2년간 죽을 뻔했다. 죽을 만큼 힘들어서 현대의학의 도움도 받고, 술에도 많이 의존했었다. 물론, 내 경우가 모든 대기업에서의 이직한 사람들을 대표하지는 않고, 내 상황이 특수했던 점도 있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퇴사나 이직을 계획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시간을 들여 들어볼 만한 경험담이라고 생각한다.
중견기업으로 이직 후 처음 만난 난관은 업무 범위였다. 지금 다니는 중견기업은 제조업 회사인데, 각 업무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난 2년간 직접 제조 빼고는 거의 모든 일을 했던 거 같다. 구매, 법무 검토, 회계, 투자 계획, 기획, 미수금 수령, 전략 수립, 영업 등등. 이게 가능하냐고? 그래서 죽을 뻔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회사가 지금 더 크게 성장하는 시기라 내가 특수한 위치였던 것은 안다. 하지만 내 주위 동료들,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된 다른 중견기업 중소기업 다니시는 분들을 보면서도 확실히 대기업에 비해 업무 범위가 매우 넓다는 것을 이직 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느꼈던 감정을 상투적인 언어로는 ‘대기업은 시스템이 잘 잡혀 있어서 그렇다’ 정도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최근 10년 새 성장한 IT 대기업을 제외하고, 삼성이나 SK, LG등 전통의 대기업은 우리나라 최고 성장기인 80~90년 대를 거쳐 시대의 혜택을 많이 봤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 다른 기업들이 넘볼 수 없는 자본력과 시설을 갖췄고, 그 덕분에 사람을 조금 여유 있게 운영해도 이익을 낼 수 있는 구조를 갖췄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자본력으로 대기업에서는 기본적으로 좋은 학벌을 가진 인재들을 데려올 수 있었고, 선순환 사이클에 들어선 게 지금의 전통 대기업이지 않나 싶다.
내가 정말 존경하는 중견기업 K회사의 L부사장님이 한 말이 기억난다. 내가 그때 왜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잘하시냐고, 대기업 보다 훨씬 영민하게 대처하는 거 같다고 말씀드리니, L부사장님은,
“우리 같은 후발주자 기업들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금방 죽어요. 우리는 어디 기댈 때가 없습니다. “
그렇다. 내가 한국의 대기업 전부를 속속들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대기업은 이미 자본력의 혜택을 보고 있고, 후발주자인 다른 중견 중소기업들은 생존을 걸고 분투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고. 비슷한 일을 처리해도 내가 대기업 다닐 때는 조금 느슨했다면, 지금 우리 회사에서는 나도 모르게 전력을 다한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회사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것을 안 봐도 유튜브이기 때문이다.
앞서 얘기했듯 2년 전 중견기업으로 이직하며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이제는 조금 적응됐다. 그렇다고 일이 편해진 건 아니다. 여전히 구매, 회계, 전략, 미수금 수령, 영업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2년 전 대기업에 다니던 나와 지금의 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제는 중견기업과 중소기업에서 고군분투를 하시는 분들이 더 잘 보인다는 것이다. 후발주자로 생존하기 위해 얼마나 피똥 싸는지. 물론, 나도 생존하기 위해 그리고 정말 열심히 하는 지금 내 동료들을 위해 피똥까지는 아니더라도 피를 조금 토할 정도로(과음하고 토한 거 아님…) 열심히 했다고 자부한다.
대기업에서 중견기업 중소기업으로 이직하는 거 쉽지 않다. 혹시 기분 탓으로 호기롭게 그런 생각을 한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하지만 또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나에게 다시 대기업으로 돌아갈 건지 물어본다면(물론, 오라는 대기업도 없다), 나는… 음… 대기업은 사양하겠다. 지옥에서 피똥 싸가며 2년 버틴 자의 여유일까? 그런 것도 좀 있겠지만, 무엇보다 지금 회사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다닐 때는 보이지 않던, 협력업체 중소기업 사장님들 직원들 그리고, 매일매일 고군분투하는 내 동료들이 있어서 그렇다.
마지막 짤로 내 마음을 전한다. (자영업 결심 말고) 대기업에서 중견이나 중소로 이직 희망하는 이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