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10년경 대한민국 3대 종합상사에서 10년 가까이 일했다. 회사는 1950년대에 설립되어 그룹사의 온갖 해외 비즈니스를 담당했다고 한다. 특히 계열사의 온갖 제품들, '동동구리무'에서부터 TV 전자레인지 등등. 007 가방에 샘플을 넣을 수 없으면 카탈로그를 들고 다녔다고 한다.
선배 상사맨들이 해외에서 팔았던 '동동구리무'
선배 상사맨들은 해외에서 경험도 많았고 말도 많았다. 그래서 구라출력 버튼을 '톡'하고 누르면 온갖 구라와 무용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아프리카 콩고 구리 광산 가는 길에, 식인종 부족을 만났지머야... 어떻게 살아났냐면...
중동 이라크에 석유부 사람들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반군을 만났는데... 어떻게 풀려났냐면...
남미 과테말라에 섬유 공장 투자 때문에 갔는데, 정글에서 차가 퍼진 거야...
동남아 버마(미얀마) 시멘트 공장 조사하러 갔는데, 손바닥만한 지네를 만난거라...(이건 내 경험담... 진짜다...)등등.
어떤 이는 선배의 선배 얘기를 자신의 얘기와 절묘하게 섞었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해외 바이어를 통해 들은 이를 마치 자기 얘기인양 구라를 풀었다. 처음에는 그저 선배들의 구라가 멋있게만 보였다. 나도 나중에는 저렇게 훌륭한 구라치는 상사맨이 되겠다고 다짐도 했었드랬다. 하지만 어느 순간 IT의 발달로 인해, (정확히는 스마트폰의 대중화 영향) 내가 꿈꾸던 상사맨의 모습은 점차 사라졌다. 어느 순간 이도저도 아닌 나를 발견했을 때 이직을 결심했다. 그렇다고 상사맨으로써의 10년 가까운 시간이 후회되지는 않는다. 나의 회사 생활 기본기는 그곳에서 이루어졌으니. 요즘도 가끔씩 포장마차에서 쏘주를 마시며 듣던 선배들의 B&G(뻥&구라)가 그립다.
나의 가장 페이보릿 B&G는 바로 중국에 관한 것이다. 그것도 옛날 중국.
내가 중국이라는 나라와 중국어, 중국 음식, 중국술을 좋아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전 석탄 기차를 타고 중국 배낭여행을 한 인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베이징 올림픽을 기점으로 중국은 G2로 성장했다고들 하는데, 나는 운 좋게도 베이징 올림픽 전의 중국을 볼 수 있었다.
걔 중에 90년 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5천 년 역사상 한국 경제가 중국을 앞질렀던 유일한 몇 년의 이야기가 나는 가장 재미있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저 멀리 중국에서 벌어진 얘기.
그때는 중국이 완전 개방 전이라 더더욱 에피소드도 많았다고 한다.
예전 상사맨들은 중국에서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어떤 이는 두부와 이백의 시를 외고, 어떤 이는 공자와 맹자의 말씀을 적힌 논어와 맹자의 일부를 외었다고 한다. 원숭이 머리와 백주를 마신 얘기, 취두부 한 사발을 일부러 먹었다는 구라도 있다.
나는 특히, 중국 북부 하얼빈에연탄을 팔러다녔던 선배 상사맨의 얘기를 좋아한다.
현지 파트너와 회의를 가지게 되었고 밖은 영하 20도를 웃돌았다고 한다. 한껏 껴입고 간 선배는 미팅 장소에 도착했지만, 현지 사무실은 난방이 전혀 되지 않았다. 현지 파트너는 "우리도 춥습니다, 하지만 이건 정상입니다"라며 웃으며 말했단다. 그날 회의는 모두 두꺼운 외투를 입은 채로 진행되었고, 이들은 "다음 회의는 여름에 하자"는 농담으로 마무리했다고 한다. 이 얘기는 구라도 아니고 흥미진진하지도 않지만, 개혁개방 전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던 90년 대 중국을 상상할 수 있어 좋아한다. 아직도 내가 가슴에 넣고 다니는 얘기다.
나는 중국에서 주재원으로 생활한 적은 없지만, 직장생활을 하며 꽤 중국에 자주 다녔었다. 어떨 때는 중국산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갔었고, 어떨 때는 중국 회사에 투자를 검토하기 갔었다. 그러다 보니, 중국어도 스스로 독학해서 조금은 할 수 있게 되었고, 자연스레 중국 문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최근에도 1년 2~3차례는 중국을 방문하고 있는데, 내 나름대로 중국에서 원활한 비즈니스를 위해 그들의 환심을 사는 법이 있다. 바로 '고향'을 공감하는 것이다.
중국은땅이 워낙 넓다 보니,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와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어디 지방 출신인지를 소중히 여기고, 각자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타향살이를 하는 이들이 대다수다. 매년 1월에서 2월 춘절(우리의 설날) 기간 중에중국의 수 억 명 인구가 고향으로 대이동을 하는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도 익히 낯익다.
춘절 연휴 이동을 위해 대기하는 중국인. 출처: NEWSIS
'고향'을 공감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나는 '청두成都*'라는 노래를 언급한다.
*중국 사천성에 위치한 도시 이름. 마라와 마파두부가 유명한 그 곳 맞다.
"你知道《成都》这首歌吗?"
"Nǐ zhīdào "Chéngdū" zhè shǒu gē ma?"
"혹시 청두라는 노래를 아세요?
청두를 부른 가수 자오레이赵雷는 이 곡에서 청두에서의 추억, 그리고 그리운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노래 가사와 멜로디 모두 청두의 낭만적인 분위기와 함께 그리움, 추억, 이별의 감정을 부드럽게 전달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생각하게 만드는 감성을 잘 나타낸다고중국에서 평가받는다. 실제로 한국인인 내가 들어도 너무 좋다. 청두를 들으며 (차로 4시간 떨어진) 고향 부산이 절로 생각난다.
2017년에 한국의 나는 가수다와 비슷한 중국의 경연 프로그램에 청두를 열창하는 자오레이(맨 위), 그리고 감명받은 관객들.
청두의 가사를 음미해 보자. (중국어는 제외하고, 한국어 번역만옮긴다. 기회 되면 꼭 원곡도 듣기를 추천!)
어젯밤의 술 때문만이 아니라
나를 눈물짓게 한 것은 너의 따뜻한 마음이었어요.
나를 아쉬움에 남게 하는 것은
너의 따스한 손길이었죠.
앞으로 얼마 더 걸어야 할지, 너는 내 손을 잡고
나를 갈팡질팡하게 하는 건, 자유를 찾고 싶어서예요.
이별은 언제나 9월에 오고, 추억은 그리움의 슬픔이죠.
늦가을의 연한 초록색 버드나무가 내 이마에 키스를 하고
그 비 내리는 작은 도시에서, 난 너를 잊은 적이 없어요.
청두에서 가져갈 수 없는 건 오직 너뿐이에요.
나랑 같이 청두의 거리를 걸어봐요,
모든 불이 꺼질 때까지 멈추지 말고.
너는 내 소매를 잡고,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위린로 끝까지 걸어가 작은 술집 앞에 앉아요.
이별은 언제나 9월에 오고, 추억은 그리움의 슬픔이죠.
늦가을의 연한 초록색 버드나무가 내 이마에 키스를 하고
그 비 내리는 작은 도시에서, 난 너를 잊은 적이 없어요.
청두에서 가져갈 수 없는 건 오직 너뿐이에요.
나랑 같이 청두의 거리를 걸어봐요,
모든 불이 꺼질 때까지 멈추지 말고.
너는 내 소매를 잡고,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끝까지 걸어가 작은 술집 앞에 앉아요.
나랑 같이 청두의 거리를 걸어봐요,
모든 불이 꺼질 때까지 멈추지 말고.
나랑 같이 청두의 거리를 걸어봐요,
모든 불이 꺼질 때까지 멈추지 말고.
너는 내 소매를 잡고,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끝까지 걸어가 작은 술집 앞에 앉아요.
고향을 떠나타향살이를 하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노래를 함께 듣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비즈니스 이상의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차로 4시간 떨어진 부산도 가끔씩 그리운데, 수천 킬로 떨어진 고향은 얼마나 그리울까... 그리고 타향살이의 설움도.
(물론, 다 필요 없고, 고량주를 잘 마시면 제일 좋지만... 아.. 고량주 많이마시고 청두를 같이 부르면 그날의 비즈니스는 무조건 성공이다)
P.S. 중국인의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 대한 영화 중 <먼훗 날 우리>강추! 넷플릭스에도 있고 재미와감동을 다 잡는 영화라고감히 평가한다. 누가? 중국을 짝사랑하는 내가.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13억 중국인 중에서 최고의 구라꾼* 소설가 위화 작가님의 소설도 추천한다. 중국의 성장과 개방 과정 속에 여러 인간 군상에 대한 에피소드와 웃음, 눈물그리고 연민이 다 담겨 있다. 중국 근대 역사 공부로써도 훌륭하다. <원청> <인생> <형제> 특히 강추.
*소설가에게 구라꾼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낯설지 않다. 위화 작가님에 필적할 만한 우리나라의 황석영 작가님의 별명도 황구라라고 하지 않나. 나도 한반도의 구라꾼이 되기 위해 지금도 틈틈이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