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의 찻값, 뜻밖의 온기
가끔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우리가 오래 잊고 살던 어떤 인간적 온기가 가만히 찾아와 마음을 덥혀 줄 때가 있다. 어제 내가 겪은 작은 사건이 바로 그랬다.
모처럼 강호철 교수님과 점심 식사 약속을 잡았다. 나는 그분을 오래전부터 존경해 왔다. 해마다 백일쯤을 해외답사로 보내며 56개국을 누비고, 그 여정 속에서 건져 올린 생태와 조경, 조형물 이야기를 ‘경관일기’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연재해 온 분. 400회를 넘긴 기록은 아마 기네스북에 올려도 좋을 만큼 경이롭다. 그런 분이 오랜만에 전화를 주셨으니, 약속을 반가움으로 기다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진주 중앙시장에 있는 백년 가게 ‘하동복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름값을 하듯 복국 맛이 일품이었고, 오랜만의 만남이라 대화도 자연스레 깊어졌다. 식사를 마친 뒤 진주성으로 향했다. 기막히게 맑고 청명한 날씨 아래 촉석루를 지나 산책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메니에르씨병을 앓고 있어 소음 있는 공간에서는 대화가 어렵기에, 이렇게 경관 속에서 걸으며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내겐 소중하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산책이라도 끝없이 걸을 수는 없는 법. 우리는 진주성 북문 근처, 강 교수님 단골이라는 작은 찻집으로 들어갔다. 공간마다 대발 칸막이가 쳐져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의자 간격이 좁아 조용히 대화해야 할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야기는 점점 무르익었고, 목소리도 자연스레 커졌다. 옆자리에서 듣기엔 조금 시끄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날 나눈 이야기는 참 여러 갈래였다. 네덜란드 튤립 식재 경관 그리고 투기 사건, 헬싱키 시민들의 개인주의적 기질, 노키아 쇠락 이후 핀란드 경제 활력 감소, 나라별 옥외광고 구조물(네델란드 화물컨테이너회사의 광고 조형물, 일본 아사히 맥주 사옥 옥탑 광고물 등), 진주시의 ‘그린 플레임’에 대한 기대, 내가 겪는 병고와 그 치유를 위해 본 영화 ‘버드맨 오브 알카트라즈’ 이야기까지…. 주제는 끊임없이 흘러갔고, 우리는 그 흐름을 따라 깊이 빠져들었다.
그런데 우리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강 교수님께 전화를 드렸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어제 우리가 찻집에서 자리를 뜨려 할 때, 먼저 나간 사람이 우리의 찻값(16,000원)을 이미 계산했다는 것. 지인인가 싶어 별 생각 없이 넘겼는데, 알고 보니 전혀 모르는 분이었다.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그 사람은 계산을 하기 전 교수님께 슬며시 다가와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칸막이 너머로 우리의 대화를 듣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가 너무 인상 깊고 마음에 남아서, 오늘은 자기가 찻값을 내고 싶다고. 교수님이 완강히 사양했지만, 그는 “오늘 뜻깊은 하루였다”며 기꺼이 계산을 마치고 조용히 사라졌다고 했다.
진주 같은 소도시에서는 아는 사람이 먼저 나가며 식사나 커피값을 계산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런 정도의 인정은 익숙하다. 하지만 아예 모르는 사람이, 그저 잠시 들렀다가 칸막이 너머로 들은 대화에 감동해 찻값을 내고 간 일이라니…. 그 따뜻한 낯섦 앞에서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난다고들 한다. 그 말은 대개 세상의 수고로움과 기이함을 가리키는 표현이지만, 때로는 이렇게 뜻밖의 선의를 일깨우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보여준 조용한 호의, 그 사려 깊음이 남긴 울림은 생각 이상으로 크다.
돌아보면, 우리는 누군가의 삶에 작은 빛이 될 만한 행동을 얼마나 하고 있을까. 인연도, 보답도 바라지 않으면서 단 한 번의 따뜻함을 건네는 일 말이다. 큰 선행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덜 외롭게 만드는 일. 어쩌면 우리가 잊고 살았던 인간다움은 그런 사소함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 나는 그 낯선 이의 행동 덕분에 하루가 더 깊어지고, 더 따뜻해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강 교수님과의 만남도, 오래 이어진 대화도 기쁘고 소중했지만, 그 모든 시간 위에 불현듯 쌓인 작은 온기가 하루를 더 특별하게 만들었다.
세상에는 참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별의별 사람 중에는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사람도, 하루의 무게를 가볍게 덜어주는 사람도 있다. 어제 만난 그 이름 모를 한 사람처럼.
그 덕분에 오늘 나는 세상이 조금 더 살아볼 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그리고 그런 생각 하나가 또 다른 나의 하루를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