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스테파노, 기독교 역사상 첫 순교자의 마지막 기도다. 돌에 맞아 숨지는 그 순간에도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위해 용서를 빌었다. 나는 가톨릭 신자이며 세례명은 ‘스테파노’다. 그 이름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할지, 나 자신에게 묻게 되는 날이 많아졌다. 순교자, 그 경건하고도 무거운 단어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순교는 단지 죽음의 방식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죽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초기 교회는 신앙을 증언하다 죽음을 맞이한 이를 ‘순교자’라 불렀다. 그들에게 순교는 고난의 극치였지만, 동시에 믿음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증언이었다. 조선시대 4대 박해 속에서도 수많은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겠다”는 한마디로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그들의 죽음은 자발적 선택이 아닌 강요된 결과였기에, 오히려 더욱 선명한 신앙의 증거가 되었다.
시대가 달라지며 ‘순교’의 의미도 확장되었다. 신념과 양심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도 순교자로 기려진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사한 주기철 목사는 개신교에서 상징적 순교자로 기억된다. 또 한편, 순교라는 말이 정치적·이념적으로 오용되며 그 본래 의미가 흔들리기도 한다. 1866년 조선에서 사망한 선교사 로버트 토머스는 일부에서 “성경을 나누다 산화한 개신교 순교자”로 불리지만,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에 섰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같은 신앙 안에서도 해석이 갈리는 이유다.
최근 미국 애리조나 글렌데일의 경기장에서 총격으로 사망한 보수 청년운동가 찰리 커크를 두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그를 “자유의 순교자”라 칭했다. 그러나 커크는 생전 마틴 루서 킹을 폄훼하고, ‘서구 사회가 소수 인종으로 대체된다’는 주장을 담은 음모론을 지지하며 확산시킨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죽음을 순교로 포장하려는 시도는 정치적 목적이 강해 보인다. 트럼프의 순교자 호칭은 증오 정치의 산물이라는 논란을 부르고 있으며, 순교의 순수성은 죽음의 형식을 떠나 공동체가 그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달려 있음을 드러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분노와 보복을 외치는 현장 한가운데서 유족이 전한 '스테파노식 용서'의 말 한마디는 가장 큰 울림을 주었다. 그런 점에서 순교란 죽음보다도, 그 죽음을 대하는 ‘자세’에서 새겨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순교를 생각할 때마다 세계 곳곳의 힘없는 이들의 절규도 함께 떠오른다. 역사적으로 강대국은 약소국을 침탈해왔고, 그 피해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전쟁, 경제 제재, 문화적 압박은 종종 테러라는 극단적 ‘균형 맞추기’ 시도로 이어진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이 피해자의 위치에서 강한 보복을 정당화했을 때, 그간 자행한 군사 개입과 경제적 수탈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결국 순교조차 어느 편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언제나 약자의 시선에서 이 불균형한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억울함은 힘이 없기 때문이고, 그 억울함을 해소하고자 저지른 폭력은 또 다른 비극을 낳는다. 그러나 그 비극 속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신념이나 공동체를 위해 생명을 내어준다. 우리는 이 죽음을 ‘순교’라 부를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 삼아야 하는가?
내가 생각하는 순교의 핵심은 ‘자기 희생’이며, ‘타인을 향한 증오가 아닌 사랑’이어야 한다. 순교는 타인을 죽이는 방식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스테파노처럼, 끝까지 용서하고 기도하는 삶 속에 진정한 순교의 빛이 깃든다. 그것이 순교가 죽음이 아니라 ‘삶의 증언’으로 기억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순교자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 죽음이 공동체에 어떤 가치를 남겼는지를 물어야 한다. 누군가의 죽음이 증오를 부추기고 또 다른 희생을 낳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순교’라 부를 수 없다. 반대로, 죽음을 통해 공동체에 화해와 성찰, 그리고 사랑의 가능성을 남긴 이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순교자로 기억해야 한다.
신앙은 때로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초월을 추구하는 길이다. 내가 스테파노라는 이름을 품고 산다는 것은, 증오와 분열의 시대에도 용서와 사랑을 향한 선택을 지향해야 함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내 삶에서 ‘순교’의 의미를 날마다 새롭게 물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부르심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