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트럴파크의 오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by 정용우

오늘 아침, 평소 깊이 존경하는 조경가 강호철 교수님으로부터 반가운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교수님이 경남일보에 연재 중인 ‘지구촌 녹색환경과 정원기행’의 네 번째 이야기, 뉴욕 맨해튼의 심장부 센트럴파크에 관한 글이었다. 거대한 빌딩 숲 한가운데 자리 잡은 100만 평의 녹지가 어떤 과정을 거쳐 조성되었는지, 오늘날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공간을 지켜내기 위해 시민들이 얼마나 헌신해 왔는지를 차분히 풀어낸 글이었다.


나는 아직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직접 밟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 공원은 실제 경관이라기보다 오히려 낭만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두 주인공이 황금빛 단풍 사이를 거닐던 베데스다 테라스, 「존 윅」에서 서늘한 긴장감이 감돌던 산책로는 이미 우리 기억 속에 각인된 풍경들이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겨울이 오면 연못의 오리들이 어디로 가는지 묻는다. 이 천진한 질문은 비정한 도시에서 갈 곳을 잃은 현대인의 고독과 순수함을 상징하며 오랫동안 독자들의 마음을 울려왔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찬미하는 이 ‘인공의 낙원’ 아래에는 우리가 쉽게 외면해 온 무거운 진실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그 출발점에는 ‘세네카 빌리지(Seneca Village)’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있다. 공원이 조성되기 전 이곳에는 흑인들이 토지를 소유하고 투표권을 행사하며 살아가던 자립적 마을이 존재했다. 하지만 1850년대 뉴욕시는 공원 건설이라는 공익의 이름 아래 공권력을 동원해 약 1,600명의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공공의 이익이 과연 누구의 희생을 전제로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이 여기서 시작된다.


세네카 빌리지의 강제 철거는 과거의 사건이지만, 공원이 만들어내는 배제의 구조는 형태만 바꾼 채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센트럴파크를 유지·관리하는 데에는 매년 1억 달러가 넘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데, 그 상당 부분이 민간 기부금으로 충당된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라는 점에서는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이는 동시에 ‘공원의 양극화’라는 문제를 낳는다. 부유한 지역의 대형 공원은 풍부한 기부금으로 더욱 정교해지는 반면, 재정 기반이 약한 지역의 소규모 공원은 관리 부실로 방치되는 현실이 반복된다. 여기에 공원 주변의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원주민이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까지 겹치면서, 센트럴파크는 때로 ‘가진 자들만의 정원’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한다.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 위에 생태적 한계 역시 분명하게 존재한다. 센트럴파크는 자연 그대로의 숲이라기보다 고도로 설계된 경관물에 가깝다. 호수와 언덕, 숲의 배치는 모두 인간의 손에 의해 정교하게 계획되었으며, 이로 인해 자연적인 생물 다양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구조적 한계가 따른다. 기후 변화로 인한 극심한 폭염이나 집중호우는 이러한 인공 생태계의 취약성을 더욱 드러낸다. 연간 4,000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만들어내는 소음과 쓰레기, 토양 압밀과 녹지 훼손 역시 공원이 감당해야 할 생태적 부담이다.


이 모든 지점에서 센트럴파크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도시공원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휴식의 공간인가, 아니면 도시의 불평등과 갈등을 덮어두는 화려한 가림막인가. 설계자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는 계급과 인종, 빈부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연을 누릴 수 있는 ‘민주적 공간’을 꿈꿨다. 그러나 150여 년이 지난 지금, 센트럴파크는 자본의 논리와 역사적 상처, 그리고 환경적 한계라는 복합적인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센트럴파크를 사랑한다. 숨이 막힐 듯한 빌딩 숲 사이에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고 흙을 밟을 수 있는 공간이 도시에 얼마나 귀중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공원의 화려함에만 머무르지 않는 일이다. 그 아래 묻힌 세네카 빌리지의 눈물을 기억하고, 공공 공간의 혜택이 어떻게 하면 소외된 지역과 사람들에게까지 공정하게 흐를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시민적 성찰이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성취에는 빛과 그늘이 공존한다. 센트럴파크는 도시 문명이 이룬 가장 눈부신 결과물인 동시에, 우리가 풀어야 할 사회적 갈등의 축소판이다. 우리가 이 공원의 아름다움과 그림자를 함께 바라볼 수 있을 때, 도시는 비로소 숨을 쉬게 된다. 홀든 콜필드가 걱정했던 그 오리들이 겨울을 나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 그리고 그 오리들을 바라보는 모든 이의 마음이 평등하게 평화로운 곳. 센트럴파크의 명암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 역시 양적 팽창이 아닌 포용적 가치와 생태적 회복력에 기반한 공원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의미의 ‘센트럴파크’일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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