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의 안부를 묻는 일

『호밀밭의 파수꾼』과 자본의 겨울

by 정용우

뉴욕 맨해튼의 심장부, 기하학적인 마천루들이 하늘의 끝을 다투는 거대한 빌딩 숲 사이에는 거짓말처럼 광활한 녹색의 대지가 펼쳐져 있다. 센트럴파크. 이 인공의 낙원은 도시가 내뿜는 피로한 숨결을 정화하는 거대한 폐이자, 콘크리트 정글에 갇힌 이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해방구다.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웅장한 수림과 보석처럼 박힌 호수는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이 찬란한 녹색의 풍경 너머로 내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소년, 홀든 콜필드의 엉뚱하고도 서글픈 질문이다. "호수가 얼어붙으면 오리들은 다 어디로 가나요?“


고(故) 장영희 교수는 홀든이 뉴욕의 뒷골목을 떠돌며 오염된 현실 세계를 경험하고 '지독한 상실감'을 맛본다고 썼다. 퇴학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차가운 거리를 헤매는 소년에게 뉴욕은 화려한 메트로폴리스가 아니라, 위선과 거짓이 판치는 냉혹한 콘크리트 정글이었다. 홀든은 그 화려함 속에서 갈 곳 없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으며 깊은 우울에 침잠한다. 그곳에서 홀든이 느낀 상실감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순수한 것들이 머물 자리가 사라져 버린 세상'에 대한 절망이었을 것이다.


홀든이 집요하게 물었던 오리의 행방은 바로 그 상실감의 정점에서 터져 나온 비명이다. 소설의 후반부, 홀든은 술에 취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밤의 센트럴파크를 찾아간다. 영하의 추위 속에서 그는 오직 오리들을 확인하고 싶어 호수 주위를 필사적으로 헤맨다. "오리들이 죽어버렸으면 어떡하지?"라는 공포에 떨며 꽁꽁 얼어붙은 호숫가를 걷다 신발이 젖고 머리에 고드름이 맺히는 지경에 이르지만, 끝내 오리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겨울이 와서 호수가 얼어붙는다는 것은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의 논리, 개발의 속도, 그리고 효율성이라는 잣대로 세상이 차갑게 식어버려, 더 이상 '무용(無用)하지만 순수한 생명'들이 발붙일 곳이 없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센트럴파크가 조성되던 1850년대, 그곳엔 '세네카 빌리지'라는 이름의 평화로운 공동체가 있었다. 하지만 공원 개발이라는 거대한 도시 계획의 서사 앞에서 그곳에 뿌리 내렸던 흑인과 소수 이민자의 삶은 오리 떼를 쫓아내듯 강제 축출되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개발'과 '진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수많은 성취 뒤에는, 언제나 홀든이 걱정했던 오리들처럼 소리 없이 사라져야 했던 소외된 사람들이 존재했다. 도시의 미관을 위해, 혹은 자산 가치를 높이기 위해 누군가의 고결한 터전은 '얼어붙은 호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홀든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해 주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택시 기사들은 짜증을 내거나 엉뚱한 물고기 이야기로 말을 돌리며 소년을 무안하게 만든다. "어딘가로 가겠지", "누군가 실어가겠지"라는 이 무책임한 방조와 무관심 속에서 소외된 존재들은 각자도생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이와 닮아 있다. 도시가 재개발되고 자산 가치가 치솟을 때, 그곳을 터전 삼아 살던 영세 상인들과 철거민들은 겨울 호수의 오리처럼 어디론가 흔적 없이 사라진다. 우리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는다. 그것이 현대인이 상실감을 외면하고 스스로를 위선으로 무장하는 방식이다.


홀든은 스스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낭떠러지 옆 호밀밭에서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아이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존재. 장영희 교수가 말했듯, 현실의 오염에 깊은 상처를 입은 이가 역설적으로 타인의 상처를 막아주려 하는 이 숭고한 결벽성이야말로 지금 우리 시대에 가장 절실한 덕목이다. 홀든이 추위에 떨면서도 오리를 찾아 헤맸던 이유는, 누군가는 반드시 그들의 소멸을 지켜보고 기억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사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화려한 센트럴파크의 조경 뒤에 숨은 오리들의 행방을 다시 물어야 한다. 자본의 겨울이 닥쳐올 때, 갈 곳 잃은 이웃들을 위해 호수의 얼음을 깨주거나 기꺼이 따뜻한 거처를 내어줄 파수꾼은 어디에 있는가.


세상이 각박해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더 많은 파수꾼을 필요로 한다는 증거다. 홀든 콜필드가 느꼈던 그 지독한 상실감을 공유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타인의 고통과 소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 상실감이야말로, 우리가 벼랑 끝으로 달려가는 이웃을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끈이기 때문이다. 거창한 개발의 구호보다 사라져 가는 작은 생명들의 안부를 먼저 묻는 이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도시는 위선을 벗고 진정한 생명의 안식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끝)

매거진의 이전글센트럴파크의 오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