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 그 고마운 회귀(回歸)의 법칙

by 정용우

올해의 겨울은 유난히도 길고 매서웠다. 병실 안은 일정하게 유지되는 난방 덕에 포근한 온기가 감돌았지만,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서슬 퍼런 냉기로 가득했다. 담낭 제거 수술을 마치고 막 깨어난 내 눈에 비친 잿빛 하늘과 나뭇가지를 흔드는 칼바람은 마치 내 몸속의 생명력을 시험하듯 차갑게만 느껴졌다. 병실의 훈훈한 공기도 마취 기운이 남은 내게는 겉돌았고, 창밖의 추위는 그대로 마음까지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침대에 누워 꼼짝할 수 없는 처지가 되니, 저 유리창 밖의 혹한을 뚫고 당연하게 누리던 일상의 활기가 얼마나 절실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 고통의 시간 속에서 나를 지탱해 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기다림’이었다. 병상에 누워 나는 중국의 석학 지선림(季羡林) 선생의 문장 ‘다 지나간다(一切都會過去)’를 끊임없이 되뇌었다. 격동의 세월을 견딘 노학자의 이 한마디는 단순한 위로를 넘어 고통을 객관화하는 생존의 화두가 되었다. 육체의 통증도, 부자유한 병실의 시간도 결국 거대한 시간의 강물에 씻겨 내려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나는 하루하루를 버텨낼 수 있었다.


‘버틴다’는 말은 얼핏 수동적으로 들리지만, 사실 그 안에는 가장 뜨거운 능동성이 숨어 있다. 그것은 다가올 미래를 향한 강력한 의지이며, 인내라는 이름의 적극적인 기다림이다. 내가 병상에서 그토록 간절히 봄을 기다렸던 것은 단순히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봄이 오면 내 건강도, 내 글쓰기도, 내 삶의 활력도 다시금 제 자리를 찾으리라는 희망의 주문이었다.


이제 세상은 다시 봄이다. 그토록 기다렸던 연둣빛 계절이 찾아오자, 내 마음속에는 ‘순환(循環)’이라는 단어가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얼어붙었던 대지가 녹고 메말랐던 가지에 물이 오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자연이 가르쳐주는 가장 정직한 진리를 목격한다. 동양 철학에서 순환은 끝과 시작이 맞물리는 '회귀'의 원리다. 밤이 깊으면 아침이 오고, 만물이 극에 달하면 다시 되돌아오는 이 섭리는 우리 삶이 결코 막다른 골목에서 끝나지 않음을 증명한다. 세상 모든 것은 멈춰 있지 않고 돌아간다. 겨울이 깊으면 봄이 멀지 않았다는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우주가 작동하는 엄연한 법칙이다.


이 ‘순환’의 원리를 깊이 묵상하다 보면, 우리는 눈앞의 슬픔과 고통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를 얻게 된다. 지금 당장 나를 괴롭히는 시련도 결국 순환의 한 지점일 뿐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지근거리에서 나를 압도하던 세상의 온갖 풍파를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조금 더 먼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지금의 통증은 건강으로 가는 통로이고, 지금의 고독은 사유의 깊이를 더하는 과정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을 헤쳐 나갈 진정한 힘을 얻는다.


실제로 마주한 봄의 정원은 순환의 경이로움 그 자체다. 며칠 전에는 화단 한쪽 구석에 유난히 빼곡하게 솟아난 꽃양귀비 새싹들을 보았다. 그대로 두면 서로의 성장을 방해할까 싶어, 조심스레 흙을 떠서 빈 화단으로 이식해주었다. 연약한 뿌리가 다칠세라 정성을 다해 옮겨 심고 물을 주니, 그 녀석들이 곧 붉은 꽃을 피워낼 순환의 시간을 준비하는 듯해 마음이 벅찼다. 또한, 겨우내 죽은 듯 누워있던 튤립 화단에도 어느새 뾰족한 초록 잎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올라오는 고약한 잡풀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뽑아내며, 나는 내 몸속에서 덜어낸 병증과 마음속의 찌꺼기들을 함께 솎아냈다.


인생이란 결국 계절의 바뀜을 몸소 겪어내는 과정이 아닐까. 때로는 매서운 칼바람에 몸을 움츠려야 하고, 때로는 따스한 햇살 아래서 꽃을 피워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계절에 머물러 있든 그것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다음 순환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이다. 수술 후의 그 혹독했던 추위와 병실의 적막이 있었기에, 지금 내 손끝에 닿는 흙의 감촉과 뜰에 돋아나는 새순이 이토록 경이로운 것이리라.


참으로 고마운 순환의 법칙이다. 만약 인생이 직선으로만 이루어져 끝없이 하강하거나 상승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절망 앞에서 일어설 용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삶은 둥근 원을 그리며 다시 돌아온다. 고통 뒤에 휴식이 있고, 겨울 뒤에 반드시 봄이 온다는 이 명징한 약속이 있기에 우리는 다시 신발 끈을 묶고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오늘도 나는 서재에 앉아 창밖의 봄 풍경을 본다. 병실에서 꿈꾸던 그 봄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내일은 다시 화단으로 나가 성장이 더딘 녀석들을 보살피고, 새로 피어날 꽃들에게 인사를 건네야겠다. 인생의 한 고비를 넘기고 맞이한 이 봄, 순환의 마디마디마다 새겨진 생의 의지를 소중히 품어 안는다. 이것이 인생이고, 이것이 우리가 계속 살아가야 할 이유다. (끝)










매거진의 이전글냄새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