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끝자락에서 피어난 작은 깨달음
며칠 전, 고교 동창 친구로부터 엄상익 변호사가 작성한 글 한 편을 접했다. 엄 변호사의 글에는 한 선배와의 대담이 실려 있었는데, 그는 오랜 삶의 굴곡을 담담하게 회고하며 “못난 꽃에게는 평화가 있다”는 말 한마디를 화두처럼 던진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마치 공원의 오래된 나무 그늘 아래서, 긴 여름을 지내온 이의 조용한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말에는 시간의 강을 건너온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못난 꽃에게는 평화가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화려하지 않기에 꺾이지 않고, 주목받지 않기에 파헤쳐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박한 존재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평화가 아닐까. 문득 노자의 『도덕경』 한 구절이 떠올랐다. “큰 나무는 쓸모없기에 베이지 않고 오래 산다.(大樹不材 故能長生)” 겉으로 보기엔 하찮아 보이지만, 오히려 그런 ‘쓸모없음’이 오래도록 살아남는 지혜가 된다는 말이다.
노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구부러지면 온전해지고(曲則全), 비어 있으면 채워지고(虛則盈), 낮아지면 높아진다(卑則高).” 그의 철학은 세상의 기준을 거슬러 쓰임 없는 것에서 진짜 가치를 발견하라고 말한다. 젊은 시절엔 이 말들이 추상적으로 느껴졌지만, 나이가 들어가니 오히려 더 실감난다. 우리는 모두 한때 ‘잘난 꽃’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 더 인정받기 위해, 숨 돌릴 틈도 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그렇게 달려오며 우리는 어느새 자기 삶의 방향마저 잊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제 인생의 끝자락에서, 나는 모든 욕망에 브레이크를 밟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나는 그 모든 욕망에 브레이크를 밟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마치 종착역을 향해 천천히 속도를 줄이는 기차처럼, 삶도 덜어냄을 통해 비로소 채워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몇 해 전 대학에서 정년퇴임하던 날, 제자들이 마련한 기념식에서 마지막 인사로 나는 이렇게 외쳤다. “물러나면서 영광, 사라지면서 자유, 잊혀지면서 평화!” 이 구절은 단지 인사말이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믿고 실천해야 할 삶의 지향점이었다.
지금 나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기며 살아가고 있다. 아침이면 화단에 핀 꽃들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낮에는 강둑길을 천천히 산책하며 숨을 고른다. 저녁이면 뉘엿한 햇살이 잔디밭 위로 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하루가 무사히 저물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이제 나는 책보다 자연에게, 말보다 침묵에게, 계획보다 흐름에게 삶을 맡기려 한다. 활자의 논리를 넘어, 느리게 스며드는 지혜를 좇고 싶은 나날이다.
이 시골은 내가 태어난 고향이다. 바람결에 익숙한 냄새가 스민 강둑길, 뒷산의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햇살, 바람 따라 너울거리는 대숲, 이 모든 풍경들이 나를 다시 사람답게 만들어준다. 도시의 바쁜 시계에서 벗어나, 이제는 자연의 느린 시계에 따라 사는 법을 배우며 이 같은 일상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문을 열면 작은 텃밭에서 가을 가지가 보랏빛으로 익어가고, 감나무 아래 떨어진 낙엽들 위로 산책 나온 고양이 한 마리가 졸음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 고요한 세계 안에서 나는 또 다른 삶의 여백을 발견한다. 그 여백은 빈칸이 아니라, 나를 채우는 틈이다. 욕심을 비운 자리마다 마음이 머물 곳이 생기고, 오래된 기억들이 따뜻한 온기로 되살아난다.
엄상익 변호사의 글에서 등장하는 ‘못난 꽃’은 노자 철학의 상징과도 같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기에 꺾이지 않고, 그 자리에 조용히 뿌리를 내리는 존재. 외롭지만 당당하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그 고요한 존재감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삶을 꿈꾼다. 꾸미지 않아도 되고,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 내면에서 우러나는 향기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삶이다.
이제 우리는 가진 것을 줄여가며 더 풍요로워지는 법, 잊혀져 가며 더 자유로워지는 길을 걸어야 한다. 어느 시인은 “기억되지 않는 것들을 위해 우리는 존재한다”고 했던가. 젊을 땐 허무하게 들렸던 그 말이, 지금은 오히려 큰 위안이 된다. 세상의 무대에서 내려오는 건 패배가 아니라, 또 다른 여백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더 잘나지 않아도, 더 가지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 충분한 삶.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소리 없이 피어나는 들꽃처럼, 못난 꽃이기에 누릴 수 있는 조용한 축복 속에서 나머지 시간을 살아가고 싶다. 이것이 내 마지막 소원이자, 지금 이 순간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삶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