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말 한마디에 깃든 인생의 힘
저의 이종사촌 형은 울산에 삽니다. 올해로 여든네 살이시며, 저보다 훨씬 인생의 고개를 먼저 넘으신 분입니다. 2년 전, 친지의 결혼식이 있어 진주를 찾았던 형을 마지막으로,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우리는 종종 전화나 카카오톡으로 안부를 나눕니다. 짧은 인사, 날씨 이야기, 그날의 건강 상태를 묻고 답하는 소소한 대화가 이어집니다.
며칠 전, 형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반가움보다 먼저 다가온 건 조심스러운 말투였습니다. "우리 아래 동생이 세상을 떠났어." 그러고는 곧 이어 덧붙이셨습니다. "그냥 알고만 있어. 굳이 다른 친척들한테는 안 알려도 될 것 같아." 짧은 통화였지만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습니다. 우리가 자주 교류하지 못했던 친척의 죽음이라는 사실보다도, 형의 그 말투, 그리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담담함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 소식을 다른 외사촌 여동생에게 전하며 혹시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알 수 있을까 싶어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녀는 진주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며 친척들 사이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해온 사람입니다. 그녀를 통해 형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오빠, 요즘 몸이 많이 안 좋대요.”
“그래?”
“신장 투석을 일주일에 두 번이나 하고, 매일 인슐린 주사도 맞는다네요.”
저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2년 전, 진주에서 마주했던 형의 모습은 생각보다 정정했고, 또렷했습니다. 내가 알던 형은 노인이었지만 노쇠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기품 있고 여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건강이 그렇게 악화되었다는 소식은 제게도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그 다음 말이었습니다.
“며칠 전에 오빠랑 통화를 했는데, 어쩜 그렇게 밝고 낙관적인지 몰라요. 말끝마다 ‘나는 괜찮다’, ‘곧 좋아질 거다’,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어’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지, 그게 형이지. 세월이 아무리 몸을 할퀴고 지나가도, 형의 마음만은 여전히 고요하고 단단한 바위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구나.
사실 형은 젊은 시절부터 그렇게 살아온 분입니다. 항상 이웃을 먼저 돌아보고, 가족과 공동체를 향한 책임감을 삶의 중심에 두었던 분. 교회에서도, 동네에서도, 친지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두터웠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힘은 그의 삶의 태도, 즉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점이었습니다.
희망이란,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의 실체라기보다, 현재를 버티게 해주는 마음의 자세일지도 모릅니다. 곧 좋아질 거라는 믿음은 마법처럼 상황을 바꾸진 않지만, 지금 이 순간, 포기하지 않고 하루를 살아내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어떤 약보다도 강한 삶의 치료제가 될 수 있습니다.
형의 “나는 괜찮다”는 말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자, 듣는 이에게 전해지는 조용한 격려였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크고 작은 고난 앞에서, 누구나 쉽게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지만, 그렇게 무너지지 않도록 해주는 힘. 그것이 바로 긍정의 언어, 희망의 말입니다.
저도 형만큼 아프지는 않지만, 저 역시 나이가 들어가며 몸의 이곳저곳에서 신호가 옵니다. 때론 병원에서의 진단이, 때론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감이 삶의 활기를 앗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형의 말을 떠올려보려 합니다.
‘나는 괜찮다.’
‘곧 좋아질 거다.’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어.’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걸어두는 연습을 하려 합니다. 그것은 단지 긍정적인 말을 되뇌는 습관을 넘어, 삶을 대하는 태도의 선택입니다. 때론 부정적인 감정도 피할 수 없겠지만,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용기만은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작은 희망이 큰 내일을 보장하지는 못할지라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오늘의 발판은 되어줄 테니까요.
삶은 결국, 어떤 말로 나 자신과 세상을 대하느냐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형처럼 긍정과 낙관의 언어를 품고 살아간다면, 비록 몸은 병에 시달릴지라도, 마음은 끝끝내 지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도 그 형에게 안부 전화를 한 통 드려야겠습니다. 그리고 말해드릴 겁니다.
“형님 덕분에 저도 조금은 더 희망을 품고 살아보려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