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저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by 정용우

10월의 하늘은 높고 맑았고 바람은 한 계절의 끝자락을 조용히 넘기고 있었다. 감나무 잎은 바람에 흔들리다 하나둘 떨어졌고, 가지는 점점 비어 갔다. 아침 햇살은 잔디밭 위로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고, 이따금 바람이 지나가면 낙엽 몇 장이 바닥을 스치듯 움직였다.


내가 단감나무 밑 자갈밭에 떨어진 낙엽을 긁고 있을 때 오랜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반가운 목소리였다. 그는 오늘 점심에 좋은 사람과 식사 약속이 있다며, 나도 같이 동석해 보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너무 훌륭한 분이니 내가 함께하면 서로에게 좋은 인연이 될 것 같다면서.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진주까지 나설 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계속되는 피로감과 통증으로 외출도 삼가던 때였다. 고맙고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선뜻 응하며 따라나설 기운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정중히 사양했다. 전화를 끊고 다시 손에 쥔 갈퀴를 들었다. 낙엽은 생각보다 깊게 깔려 있었다. 이미 잎을 반쯤 비운 감나무 아래서, 자잘한 돌 사이에 낀 낙엽들을 긁어내는 일은 느리지만 단순한 집중력을 필요로 했다. 그 단순한 반복 속에서 문득, 나도 이제는 조금씩 나 자신을 정리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생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왔다. 태어나서 스무 살까지는 부모의 품에서 자라며 육체적 성장을 이루고 삶의 기초를 다지는 시기였다. 그다음 마흔까지는 사회에 나아가 독립하고 배우며 기반을 다지는 시기였고, 마흔에서 예순까지는 배운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나누며 살아가는 시기였다. 그리고 지금, 예순 이후의 시간은 다시 자신을 돌아보고 덜어내며 삶을 정리하는 시기라 여긴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나를 있게 해 준 어떤 본래적 존재에게 나를 되돌려드리는 준비의 시간이다. 그 존재를 하느님이라 불러도 좋고, 도(道), 진인(眞人), 지인(至人)이라 불러도 좋다. 나는 이 시기에 나를 맑히고 정돈하는 일을 삶의 중심에 두고 있다.


젊을 때는 무엇이든 더 가지려 했다. 더 배우고, 더 만나고, 더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리어 내려놓는 법을 배우고 있다. 도를 위해 하루하루 덜어낸다는 뜻의 ‘위도일손(爲道日損)’은 나이 들며 비로소 체득하게 되는 삶의 방향이다. 욕망과 감각의 세계는 잠시도 쉬지 않고 우리를 유혹하지만, 그 끝은 늘 피로함이었다. 그래서 요즘 나는 더 알기보다 덜 알고, 더 소유하기보다 덜 가지려 한다.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얕은 인연보다 깊은 고요가, 그리고 분주한 만남보다 조용한 거리가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배려하지 못할 관계라면 시작하지 않는 것이 옳고, 감정이나 욕망이 앞서는 만남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 사실을 이제는 안다. 만나지 않는 일이 때로는 더 큰 예의가 되기도 한다.


감나무에서 계속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나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나무는 제때가 되면 조용히 잎을 떨군다. 그 잎들은 땅에 닿아 서서히 흙이 되어 간다. 그 장면은 겉보기에는 쓸쓸하지만 실은 질서 있고 평온하다. 나도 그렇게 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쥐고 있는 이 많은 생각과 감정, 오래된 기대와 미련들은 언젠가는 놓아야 할 것들이다. 그리고 지금이 그 적기일 수 있다. 내가 남긴 자리를 누군가가 다시 정돈하고, 또 다른 생명이 이어질 수 있도록 감나무처럼 나는 조용히 잎을 떨굴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새로운 만남보다 나를 정리하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 더 가지는 삶보다 덜어내는 삶이 더 단정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가볍게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밖으로 향하던 시선이 안으로 향하고, 연결을 추구하던 마음이 단절의 자유를 배운다. 감각에 이끌리지 않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그저 조용히 흘러가듯 살아가는 일. 그것이 지금 내가 바라는 삶이다. 삶의 뿌리는 땅 아래로 더 깊어지고, 가지는 하늘로 뻗어도 꽃은 다시 지고 열매는 떨어진다. 그 단순한 이치를 나는 받아들이려 한다.


어떤 이와 식사를 함께하며 친해지는 일도 분명 의미 있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나는 감나무 아래서 흙냄새를 맡으며, 낙엽 하나하나를 긁어내는 시간이 더 내게 맞는 선택이라 생각했다. 삶은 항상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된다. 바람이 부는 방향을 거스를 수 없다면, 차라리 바람 속에 머무는 법을 배우는 편이 낫다. 지금 나는 하루하루 덜어내며, 언젠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저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 짧은 문장이 내 삶 전체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