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를 보며 형평운동을 생각하다

by 정용우

들녘의 바람에 코스모스가 흔들립니다. 한 줄기 햇살에도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 몫의 빛을 담아내려 애쓰는 가을꽃입니다. 이미 일년초의 잎과 줄기는 시들고, 활엽수의 가지는 앙상하게 드러났습니다. 저물녘 가로수의 그림자가 길어질 때마다, 마음에 고적함이 번지는 것은 계절의 이치인 듯합니다.


제가 사는 이곳 진주에서는 며칠 전, 100여 년 전에 일어난 역사적 형평운동을 기념하는 영화제가 올해로 3회째 열렸습니다. 문득 들녘에 핀 가을꽃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저는 그 역사적 정신을 함께 생각합니다.


진주에서 피어났던 형평운동의 정신, 신분의 벽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고자 했던 이들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오는 듯합니다. 우리 사회 그늘진 곳의 이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삶을 바꾸려 했던 실천적 운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약하되 굳건했고, 작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름 없는 풀꽃처럼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조용히 증언했습니다. 더불어 사는 평등사회를 지향하며, 단지 차별을 없애는 것을 넘어 이들에게 애정의 눈으로 대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그들이 건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북돋우는 것이 이 운동의 참된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코스모스를 바라보면 그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고통을 말하지 못한 채 웃음을 짓던 이들, 무관심 속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으려던 사람들. 그들은 모두 들녘의 코스모스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고, 해가 저물어도 다음 아침을 기다릴 줄 아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연약해 보일지라도, 무리 지어 피어있는 코스모스처럼 고유한 존엄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높고 훌륭한 이를 섬기라 하면 거부감이 덜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보다 작다고 여기는 사람, 사회적으로 죄인이라 불리는 이들의 종이 되라고 하면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솔직한 마음일 것입니다. 형평운동의 정신은 바로 이러한 마음의 장벽을 넘어,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진정으로 끌어안는 것은, 곧 자신보다 낮은 곳을 향하는 겸손한 시선과 실천을 요구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희망하는 법조차 잊은 채 불안에 떨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나락으로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실낱같은 한 줄기 희망입니다. 희망은 그들을 살리는 양식이자, 다시 일어서게 하는 조용한 신호입니다.


희망은 어둠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색을 드러냅니다. 절망이 짙을수록 한 줄기 빛은 더욱 선명합니다. 어둠은 깨어진 약속이자 버려진 꿈일 뿐이지만, 그 속에서도 다시 살아나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형평운동의 정신이 그러했고, 지금 이 시대의 약자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거대한 변화가 아니라, 단 한 줌의 희망입니다.


가을 저녁, 길게 드리운 그림자 사이로 코스모스가 마지막 빛을 품고 있습니다. 그 꽃잎은 말없이 속삭입니다.

“희망은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납니다”


저는 그 말 앞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입니다. 형평의 뜻이 그러하듯, 진정한 평등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서로의 아픔에 눈을 맞추고, 작지만 단단한 마음으로 손을 내미는 일. 그것이 곧 우리가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이라 믿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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