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일기] 내 안의 나를 새롭게 발견하다.

글. 애리 / 명상하며 감사하며

by 애리

참 이상한 일이다. 그냥 걷고 있었을 뿐이고, 매 순간 내 발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었을 뿐인데, 불현듯 진리의 한 조각이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내 안의 빈 퍼즐을 맞추듯 갑자기 무언가와 결합되는 듯한 이 기분과 갑자기 정리되는 생각의 한 편이 나에게 왔다. 나는 아직 이에 대한 논리를 설명할 재주가 없지만, 내가 종종 겪는 이 현상은 분명히 알고 있다. 나는 이것을 "내 안의 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라고 일컫기로 한다.

한강을 걸으면서 나는 감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소한 모든 일에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아주 드물에 찾아오는데, 요즘이 딱 그렇다. 최근에는 친구를 만나서 수다를 떨고 있을 때, 멋진 카페에서 향긋한 커피를 눈 앞에 두고 먹음직스러운 빵과 함께 안전하고 편안하게 이 곳에 있을 수 있는 이 자유로운 시간에 감사했다. 오늘도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문이 절로 되뇌어지는 것이다. 친구의 말처럼 내가 퇴사를 하고 나니 세상이 아름다워보이고, 또 당장 벌이가 없음에도 삼시세끼를 먹을 수 있으니까 저절로 감사하게 되는 것 같다는 말이 수긍이 간다. 같은 맥락에서 남편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내 앞 날을 물적, 심적으로 든든하게 지원해주고 있는 남편 덕분에 이 길을 걸을 수 있고 새로운 꿈도 꿔볼 수 있으니까. 내가 직장을 다니고 있는 동안,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도전하고 싶어도 도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며 내가 본인 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절절하게 날 설득했던 남편은 지금도 여전히 나의 편이 되어주고 있다. 내 인생에 이 사람이 있음에 감사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전해주는 응원과 격려, 베품 그리고 기회에. 세상이 주는 이 선물에 마음 가득 감사함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마음에 감사가 가득하면 저절로 행복이 찾아온다.


혹자는 '그래, 너 행복해서 좋겠다?' 하며 내가 행복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꼬투리 삼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스스로의 환경과 비교하면서 말이다. 그런 사람이 없길 바라며 쓰고 있지만, 혹시하는 마음에 덧붙인다. 스토리텔링을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사실 모든 것은 관점, 해석, 방향성의 차이이다. 내가 하고자 한다면, 불만으로도 내 세상을 가득 채울 자신이 있다. 단지, 내가 그것을 원치 않고. 다만, 그간 내가 작은 일에 감사하는 연습을 많이 했을 뿐. 게다가 나의 불안한 마음을 타자에 대한 불만으로 덮으려는 시도가 언제나 내 삶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내게서 행복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찾아지듯, 불행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도 언제나 발견되는 것이다. '너는 돈 벌어다주는 남편이 있으니까, 나는 아니야.'라고 하면서 남이 행복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찾듯이, '나는 오늘 마신 커피 한 잔이 너무 맛있었어' 하며 내가 불행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으면 된다. 행복과 불행은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산책길의 끝에 다다를 즈음, 나는 내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간, 보고서를 쓰고 프레젠테이션을 완성해나갈 때마다 내가 만족스러울 때까지 붙잡고 해내야만 했던 나의 집착. 분명 누군가를 만족스럽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그 기저에는 나의 만족 또한 상당히 중요했던 일하는 방식. 마치 모든 것을 차단한 채 동굴 속으로 들어가듯, 한 가지에 몰두해서 완성될 때까지 갇혀있는 작업 스타일. 프로젝트 보고서에서 조차 온 마음과 감성을 담아 혼자 울면서(결코 쓰기 싫거나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작성했던 글. 세상 모든 것에서 글감을 얻고 의미를 담고 싶은 욕심. 한참 작업 중에 방해를 받았을 때 날카롭게 찢어지는 예민한 성미까지.


일이 좋아서, 프로젝트로, 비즈니스적으로 탁월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특성들이 조금 비껴서 바라보니, 글이 좋아서, 글에 진심이라서, 마음이 자꾸 넘쳐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하니 새롭게 보였다.


얼마 전, 남편이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더니, 이제 글도 조금씩 쓰고 정말 작가가 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네?' 라는 말이 오버랩되면서, 작가가 되고 싶었던 건 참 오래 전인데 내가 이런 말도 했었나? 싶었다. 그러고보니, 요즘엔 글을 쓸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다. 그래서 또 어쩐 일인지 '작가'라는 가슴 벅찬 단어가 또 내 마음 속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 것도 같다.


이렇게 또 한 번 인생에 무한한 가능성이 보이는 순간이 온 건가?

대학교를 졸업 하기 전, 아직 취업이 결정되지 않았던 그 때. 나는 참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순간이라고 생각했었다. 뭐든지 될 수도 있는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그 순간이 멋져보였다. 퇴사를 하고 나니, 다시금 그 때가 생각이 난다. 나의 선택에 따라, 무엇이든 되어 볼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다. 어차피 미래는 불확실하다.

그 불확실함을 받아들이는 나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한강 공원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면서, 명상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호흡에 집중할 뿐인데, 나를 알아차리고 나를 깨닫게 한다.


우리는 왜 명상을 해야할까?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에이, 그건 아니다. 이 도시에 사는 현대인에게 소위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나 극락을 위해 수행을 해야한다는 건 어쩐지 설득력이 없다.


그러다 문득, 새로운 해석이 떠올랐다. 사실, 고타마 싯다르타(석가모니, 불교의 창시자)도 깨달음을 목표로 보리나무 밑에서 명상을 했던 것은 아니다. 평범한? 왕자이던 시절 이 세상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왜 사는가?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구했던거지, '나 고타마, 대단한 깨달음을 얻고 돌아오겠어!'라고 출가한 것은 아니었지 않은가.


인생의 답을 구하고자 헤매고 노력하고 시간을 들여 자신의 답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애리 가라사대.

열반(해탈의 경지, 고뇌가 사라진 상태)은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열반은 내 안에서 그 길이 있다. 내가 나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인생의 답을 찾았다면 그곳이 열반이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인생의 참 맛을 느꼈다면 내 열반은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행복하고 안락했으며 평온했고 고요했다. 그러면 인생의 답을 구하는 여정에 나름 방향을 맞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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