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부부의 P여행기 1

글. 강혜영 / 2024.02.09-02.10 @군산

by 애리


조금은 지쳐있었나봐

쫓기는 듯한 내생활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몸을 부대어보며

힘들게 올라탄 기차는

어딘고 하니 춘천행


1989년 김현철의 <춘천가는 기차> 노랫말처럼, 우리 부부는 지쳐있었다. 여행 한 번 가려면, 한 사람은 30분 단위로 촘촘하게 짜여진 엑셀표를 몇 주간 공들여 만들어야 했다. 또 한 사람은 지메일(Gmail)에 전송된 ZIP파일에 담긴 각종 서류를 열고 또 열어봐야 했다. 우리 부부 사이엔 반복되는 노랫말처럼 떠도는 말이 있다. "누가 일정을 30분 단위로 짜~"


둘이 함께가는 여행이 제일 재밌다고 하면서도 생각만큼 자주 가진 못한다. 치열하게 놀기 위한 완벽한 계획도 우린 치열하게 짜야했다. 잘 짜여진 계획은 우리 여행의 필수품이자, 여행을 미루는 유일한 장애물이었다. 장애물이 있다면, 넘어갈 것인가? 돌아갈 것인가? 기로에서 나는 장애물을 아예 없애버리기로 했다.


남편에게 '우리 그냥 아무것도 정하지 말자. 아침에 눈을 뜨면, 어느 역으로 갈 지부터 즉흥적으로 정해서 가자.' 라고 말했다. 한시름을 덜은듯, 너무 좋아하는 남편이 보였다. 계획 없이 살지 못하는 우리 J들이 '계획을 하지 않기로 계획하는' 기가막히는 계획을 짠 것이다. 진짜 즉흥적인 P 친구들은 비웃겠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우린 새로운 여행에 설렘을 느낀다.

11:00 눈을 뜨고 뒹굴거리다가 씻고

12:40 집을 나선다.

집 앞 김밥집에서 김밥 네줄을 산다.


12:52 네이버 <원판돌리기>게임에 서울역, 용산역, 청량리를 입력하고 돌린다. 용산역이 나왔다. 용산역으로 간다.


설 연휴가 시작되어, 우리가 갈 수 있는 티켓이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걱정은 없다.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고, 어디로든 가게 될테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선택지 만큼은 없다.


13:30 용산역에 도착했다.

처음 온 듯 새롭고, 눈에 보이는 풍경이 어쩐지 신기하고 멋지다. 외국 여행객이 용산역에 처음 내려 보는 서울의 풍경이라고 상상해본다. '우리나라도 멋있는데? 도시의 멋이 풍기는데?' 놀러나왔다는 사실 만으로 머리가 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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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역 앞, 새파란 하늘 만큼이나 푸르른 도시의 빌딩



시작되었다.


코레일 어플도 열어보고, 전자 티켓팅 머신도 눌러보면서 지금 당장 갈 수 있는 역을 조회해보려 했다. 목적지가 확실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두 개의 전자시스템은 우릴 도울 수 없었다. 수많은 역 이름을 하나씩 눌러보며 자리가 있는지 알아보는 건, 인간적이지 못하다.


이럴 때 가야하는 확실한 장소는 역 창구. 알고리즘보다 위대한 시스템을 장착한 '사람'에게 가야할 때다.


"목적지 관계없이, 지금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기차표 2명 있나요?"라는 한 마디에 정말 10초도 안되서 창구 직원은 답을 주었다. 인간 만세. 그러나 안도하긴 일렀다. 다음 기차는 16시 반, 그리고 오직 입석.

명절에 시도하기엔 우리가 너무 무모했던걸까?


13:40 입석 밖에 없다는 사실에 저절로 뒷걸음이 쳐졌다. 그리고 정확히 4분 만에 우리는 티켓을 구했다.

14:24 순식간에 김밥 네줄을 해치우고, 군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것도 나란히 앉아서.


귀인의 존재를 믿는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한 사람의 인생에서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어주는 그런 귀인 말이다. 나는 항상 귀인을 기다려왔다. 내 평생 속에서. 나를 기존에 있던 세계에서 전혀 다른 꿈의 세상으로 데려다 줄 귀인을 언젠가 꼭 만나고 싶다. 그래서 가끔은 '당신이 나의 귀인일까?' 하며 저울질을 해본다. 알고 있다. 내 인생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있었는데 몰랐을 수도 있고, 있을텐데 인생을 다 살고나서야 알게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어쩐지 마음이 설레고 기대가 되는 존재가 '귀인'이다.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귀인을 만났다. 조금 헷갈린다. 나의 귀인이신가요? 내 남편의 귀인이신가요?


귀인께서는 뒷걸음질 친 우리의 뒤에 서 계셨다. 그저 담백하게 우리에게 묻는다.

- "어디까지 가세요?"

- "어, 저희 사실 목적지는 상관없어요.

어디든 갈 수만 있으면 돼요."

- "군산가는 표 2장이 있는데,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갑자기 못온다고 해서...이거 티켓 취소하면 수수료도 내야하고 번거로우니까, 혹시 생각있어요?"


우린 그렇게 인쇄한 지 딱 10분이 지난 승차권을 손에 넣었다. 연신 수수료 아까워서 그렇다는 얘기를 하시는 귀인의 주절거림과 나의 환한 미소, 계좌 이체를 하는 남편의 분주한 손놀림. 세명이 선 자리가 삼각형을 이루듯, 우리 셋의 삼박자가 참 듣기 좋았다.


우리는 오늘 군산에 간다.



2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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