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 출판사 사무실은 파주 교하의 한 고즈넉한 구석에 있습니다. 요즘 저는 사무실 창문을 열고 하루에 한 번 구름 사진을 찍습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뭉게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난 하늘, 해 뜰 무렵의 어스름한 하늘. 풍경이 좋아서 찍기도 하지만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꾸준히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떤 분이 볼지 모르는 귀한 지면에 구름 이야기만 잔뜩 했네요.
유유는 인문 교양서를 만듭니다. 저희가 생각하는 교양은 단단한 내면을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어서 사실 따라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시때때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요구받고요. 이런저런 실무 기술도 필요하고, 전문 지식도 필요하죠. 그러나 예기치 못한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필요한 바탕이 되는 자질을 저희는 단단한 내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서도 흔들림 없이 당면한 사태를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파악하고 대처하는 힘은 단단한 내면에서 나옵니다. 저희는 이 단단한 내면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을 만들어 보려고 해요.
2012년에 첫 책을 낸 뒤로 많은 책을 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유유의 책 몇 권을 꺼내 쫙 깔아 보았어요.
유유 책을 살펴보면 뒤쪽 책날개에 책 두께와 동일한 두께로 홈을 파 놓았습니다. 이기준 디자이너가 낸 아이디어인데요. 이 홈을 따라 책날개를 접으면 책갈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책 읽을 때 꽤 유용하지요. 이번엔 이 뒷날개 책갈피로 책배를 감싼 유유의 책들입니다.
이리 쌓아 놓고 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책마다 사연 없는 책이 없습니다만 오늘은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소설의 첫문장』, 『동사의 맛』을 쓴 저자 김정선 선생과의 각별한 인연을 들려 드릴까 해요.
김정선 선생과 처음 만난 건 편집이라곤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편집자로 한 출판사에서 교정일을 할 때입니다.
책을 많이 빨리 내는 걸 중시하는 출판사여서 교정은 외주로 다 빼고 내부의 담당 편집자는 외부에서 교정을 마친 원고를 가지고 책을 마무리해서 출간하는 시스템으로 굴러가고 있었어요. 당시 저는 출판사 내부의 담당 편집자였고, 김정선 선생은 외주 교정자였습니다. 지금은 좀 바뀌었길 바라지만 당시 회사 안에는 교정 초짜인 제게 제대로 교정을 가르쳐 주는 선배가 없었습니다. 아니, 회사에 그런 시스템이 없었다고 말해야겠네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 문제 해결 방법 중 가장 좋았던 게 제 생각에는 선배가 본 교정지를 보는 방법이었습니다. 내부 편집자들은 제각기 자신의 외주 교정자와 책을 진행하느라 바빴고 내부에서 크로스 교정을 볼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기에 저는 외주 교정자가 본 교정지와 본문 디자이너가 수정해 준 교정지를 나란히 놓고 대조를 하면서 교정하는 법을 익히곤 했습니다. 모르거나 확실치 않은 것이 있으면 김정선 선배에게 자주 묻고 확인했고요. 그렇게 편집자와 외주자로 처음 만난 김정선 선생과는 제가 회사를 두어 차례 옮긴 뒤에도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고 하는 선후배 사이가 되었습니다. 유유를 창업한 후 초기에 원고 수급에 쩔쩔매던 무렵, 김정선 선배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그동안 여기저기 썼던 원고를 모은 게 있는데, 한번 봐주시겠어요?"
선배의 글솜씨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드러내진 않으셨지만 글깨나 읽는 독자들 사이에서 서평으로 꽤 알려지시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선배가 가진 편집자로서 책을 보는 안목이나 관점을 믿고 있던 터여서 보내 주신 원고를 꼼꼼히 읽었습니다. 한 장르로 묶기 어려운 다양한 글들이었는데, 그중 한 꼭지를 읽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 꼭지는 하나의 동사에 대한 단상을 적은 글이었어요. 글이 재미있고 좋은데, 한 편만 읽자니 아쉽더군요. 해서 선배께 요청을 드렸습니다.
"동사들을 정리하고 묶어서 쓸모와 단상을 함께 적어 주실 수 있을까요?"
제안드리고 나서 한참 깜깜무소식. 저는 선배에게 그런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메일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어요. 선배가 완성된 원고를 보내왔지 뭔가요. 제가 제안했던 원고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단순히 동사들을 묶고 쓸모와 단상을 정리하는 차원의 원고를 생각했을 뿐인데, 선배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헷갈리기 쉬운 동사 두 개씩을 짝짓고 동사의 쓸모와 단상을 정리한 건 물론이고 짝지은 동사 두 개를 활용해 이야기까지 만들어서 보냈지 뭡니까. 국내 저서를 무척 하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쉽지 않아서 고민하던 때에 선배의 원고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물과도 같았습니다. 이후로는 일사천리.
출판계에는 원판 불변의 원칙이란 말이 있습니다. 제아무리 탁월한 재주를 가진 편집자라도 처음 저(역)자가 준 원고의 퀄리티가 유지된다는 내용인데요. 선배가 준 원고는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바로 인쇄해서 책을 찍어 내도 크게 문제 없을 정도로 말끔했습니다. 이리 하여 나오게 된 책이『동사의 맛』입니다. 헷갈리는 동사를 짝지어 동사를 공부할 수 있도록 한 교양로서는 처음이라서인지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책을 만든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지요. 『동사의 맛』은 지식만 전달하는 책이 아니라 이야기도 담고 있었던 덕분에 한 젊은 만화가에 의해 각색되어 만화책으로 나오게 됩니다. 『만화 동사의 맛』이 그 책인데요. 저자인 김영화 작가가 『동사의 맛』을 읽고 좋아서 본인이 직접 그린 샘플 만화로 유유에 투고를 하여 책이 된 흥미로운 사연도 가지고 있답니다.
이렇게 책마다 사람과 사람, 사건과 사건이 얽히고설킨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지요. 앞으로 만들어 낼 책들도 이런저런 재밌고 유익한 이야기가 생겨날 수 있도록 한 권 한 권 꾸준히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매일 같은 장소에서 구름 사진을 찍는 일처럼요.
"이 브런치 '위클리 매거진'은 스토리펀딩의 "모험을 시작한 작은 책들"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참조해 주세요. 작은출판 컨퍼런스의 참여권은 펀딩을 통해 구매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