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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헌드리더 Aug 22. 2018

우리 함께 시를 읽어볼래요?

시집을 읽는 사람에서 시집을 만드는 사람으로

『불안의 서』, 『인간과 말』, 『달몰이』, 『천천히, 스미는』, 『슬픈 인간』 등. 네, 봄날의책에서 나온 산문집들이에요.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단 하나의 눈송이』. 이들은 ‘세계시인선’이라는 이름 아래 나온 시집들이고요. 언제부턴가 시를 읽기 시작했어요. 재미삼아, 약간은 폼으로. 책들마다 가치 있고 필요하고 하겠지만, 그중 시집이 가장 근사해 보였어요. 어쩌면 가장 가난한 문학, 그래서 가장 진정성 있는 문학이라고 믿어버렸던 듯해요. 어쩌다 보니, 시집 출간에 마음을 빼앗겨, 당분간은 ‘시집 내는 출판사’로 불릴 것 같아요. 그동안 나온 시집들, 앞으로 나올 시집들, 그리고 이후 내고 싶은 시집들 속에서 시 몇 편을 펼쳐 보고자 해요.        


쉬운 시, 지혜의 시

울라브 하우게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노르웨이 작은 마을 울빅(Ulvik)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서 살다 떠난 시인이죠. 1928년 원예학교에 입학해, 이후 평생을 정원사로 사셨죠. 시인의 가장 좋은 시는 숲에서 쓰였다고 하네요. 정원사 시인? 매일 몸을 부려 노동하는 시인? 너무 당연한 일인데도 조금은 낯설고 그렇네요. 시인의 시 두 편을 함께 읽어보지요. 짧은 시 하나와 조금 긴 시 하나예요.      


긴 낫에

늙은 몸 의지한다.

풀밭

낫이

조용히 노래한다.

내 마음 혼란스러워라

괜찮아요

풀들이 말한다.

―「긴 낫」(임선기 옮김)    


오직 비 때문에

길가 

늙은 참나무 아래

멈춰선 건 아닙니다, 넓은 모자

아래 있으면 안심이 되죠

나무와 나의 오랜 우정으로 거기에 

조용히 서 있던 거지요 나뭇잎에 떨어지는

비를 들으며 날이 어찌 될지

내다보며

기다리며 이해하며.

이 세계도 늙었다고 나무와 나는 생각해요

함께 나이 들어가는 거죠.

오늘 나는 비를 좀 맞았죠

잎들이 우수수 졌거든요

공기에서 세월 냄새가 나네요.

내 머리카락에서도.

―「비 오는 날 늙은 참나무 아래 멈춰서다」(임선기 옮김)    


참 쉽지요. 그리고 참 따뜻하지요. 문득, 마음이 평온해지고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시들이 아닌지요. 좋은 시는 그저 눈으로 읽어도 좋고, 소리 내 읽어도 참 좋습니다. 긴 낫이 풀들을 지나가는 소리, 조용히 흔들리는 풀들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는 듯하네요. 시에서 향기가 난다(시인은 이것을 ‘차향(茶香)’이라고 불렀지요)는 말처럼, 우리 감각을 자극하고 깨우는 시네요. 날이 어찌 될지 기다리는 시인은 시 속의 늙은 참나무 같은 신실한 존재이기도 하지요. 

다음에 소개할 시인은 구동독 출신인 라이너 쿤체 시인이에요.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정치적인 이유로 공부를 중단하고 자물쇠공 보조로 일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동독 시절, 더없이 말을 아낀 섬세한 언어로 시를 쓴 시인은, 그가 쓴 따뜻한 시들이 동독 독자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로, 구동독 정보국의 감시를 줄곧 받았답니다. 한데, 정보국이 관리한 쿤체 시인의 파일명이 ‘서정시’였다고 하네요. 이런 우스운 상황이 있나 싶네요. 

살펴볼 시들은 시인이 노년에 쓴 것인데요, 잔잔하되 연륜이 흠씬 느껴지는 작품들이에요. 유년기 기억과 현재의 시작(詩作)이 한몸을 이루는 시에서, 이삭과 말(語)은 그 크고 작고를 떠나 모두 소중한 존재로 여겨지네요.     


우리 나이

굽히기가 어려워지는 나이,

하지만 쉬워지지

숙이기    

우리 나이

놀라움이 커지는 나이    

우리 나이, 

믿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태초에 있었던 말씀은 존중하는 나이

―「우리 나이」(전영애 옮김)    


사물들이 말이 되던 때

내 유년의 곡식밭에

밀이 여전히 밀이고, 귀리가 귀리이던 때,    

추수가 끝난 빈 밭들에서

나는 어머니와 주웠다, 이삭을    

그리고 말(語)들을    

말들은 까끄라기가 

짧기도 하고 길기도 했다

―「사물들이 말이 되던 때」(전영애 옮김)    


 윤동주를 좋아한 일본의 두 여성시인

“시인이 시인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했다. 그런 시대가 있었다”(이바라기 노리코)는 말 속 시인은 윤동주 시인을 가리킨다고 하네요. 먼저 소개할 사이토 마리코 시인은 중학생 때부터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의 시를 애독해 왔다고 합니다. 이바라기 시인은 50세를 넘어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고 1980년에는 번역 시집 『한국현대시집』을 출간했다고 하네요. 참, 대단한 시인이네요! 사이토 마리코 시인은 그런 이바라기 시인을 참 좋아하고 존경했답니다. 시인 윤동주 그리고 한국어에 대한 매력을 느낀 사이토 시인은 한국에 건너와 대학교 어학당에서 한글을 배운 뒤 한국어로 시를 썼어요. “눈으로 본 것, 마음에 떠오른 것을 말하고 싶어도 제대로 못했던 답답함이 시를 쓰게 만들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고 사이토 시인은 말합니다. 시가 나를 ‘찾아왔다’는 시인의 표현대로, 한국에 1년 3개월 머무는 동안, 시인은 한 권의 한국어 시집을 상재합니다.

어쩌면 시인에게 시는 놀이이기도 했던 듯해요. 다만 ‘눈송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어서 「눈보라」라는 시를 썼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서요. 물론, 한국인이 보기에 시인의 언어는 조금은 어색한 말, 더듬거리는 말, 불완전한 말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한편 새로운 말, 가능성을 키운 말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시 두 편을 함께 읽어 보지요.     


(…) 먼저 창문 밖에서 풀풀 나는 눈송이 속에서 각자가 눈송이 하나씩을 뽑는다. 건너편 교실 저 창문 언저리에서 운명적으로 뽑힌 그 눈송이 하나만을 눈으로 줄곧 따라간다. (…)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시키고 따라가야 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났다. (…)

―「눈보라」(사이토 마리코)    


바다를 건너가는 떼로부터

뒤처져버린 새 한 마리는

따라붙을 수 있으리라 믿고 날아가면서

어느새 바다 그 자체가 될 것이다    

하루가 작은 새 한 마리라면

나는 그 긴 홰이고 싶다

―「난류」(사이토 마리코)    


근데, 한국을 떠나 일본에 닿았을 때, 사이토 시인은 더 이상 시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고 하네요. 어떤 분위기 탓일 수도 있고, 이방의 말에서 모국의 말로 돌아왔을 때 생긴 침묵일지도 모르겠네요. 대신, 시인은 한국소설을 열정적으로 번역합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박민규의 『카스테라』 , 한강의 『희랍어 시간』, 황정은의 『야만적인 앨리스 씨』 등을요. 

그와 달리,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은 내내 일본에 머물며 시를 썼답니다. 전쟁과 폐허의 시간을 경과한 이바라기 시인의 눈에 비친 일본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간격을 두지 않고 동시간대 속에서 펼쳐집니다. 멋 부리가 딱 좋은 청춘의 생을 비극의 한순간에 고착시켜버린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 사건에 영영 갇히지 않고 사건 너머의 사람들, 풍경들을 조금씩조금씩 상상하고 그려 보기도 하네요(「내가 가장 예뻤을 때」). 한국인 독자인 저한테도 시 속 아스라한 풍경들이 슬핏슬핏 스쳐가면서 그리움을, 슬픔을,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시들이에요. 소설가 공선옥의 작품 제목으로도 유명한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그리고 신동엽의 시 「산문시 1」의 분위기를 얼핏 떠올리게 하는 시 「처음 가는 마을」입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마다 와르르 무너져 내려 

엉뚱한 곳에서

푸른 하늘이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곁에 있던 이들이 숱하게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 모를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누구도 다정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모르고

순진한 눈길만 남긴 채 모두 떠나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머리는 텅 비고

나의 마음은 완고하여

손발이 짙은 갈색으로 반짝였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의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멍청한 짓이 세상에 또 있을까

블라우스 소매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마구 걸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 재즈가 흘렀다

금연 약속을 깬 날처럼 어찔어찔한 정신으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탐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너무나 불행했고

나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나는 무척이나 쓸쓸했다    

그래서 다짐했다 되도록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 무척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내가 가장 예뻤을 때」(정수윤 옮김)     


처음 가는 마을에 들어설 때에

나의 마음은 어렴풋이 두근거린다

국수집이 있고

초밥집이 있고

청바지가 걸려 있고

먼지바람이 불고 

타다 만 자전거가 놓여 있고

크게 다를 것 없는 마을

그래도 나는 충분히 두근거린다    

처음 보는 산이 다가오고

처음 보는 강이 흐르고 

몇몇 전설이 잠들어 있다 

나는 금세 찾아낸다 

그 마을의 상처를

그 마을의 비밀을

그 마을의 비명을    

처음 가는 마을에 들어설 때에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떠돌이처럼 걷는다

설령 일이 있어 왔다고 해도    

날씨가 좋은 날이면 

마을 하늘에는 

예쁜 색깔 아련한 풍선이 뜬다

마을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하지만 

처음 온 내게는 아주 잘 보인다 

그게 뭐냐면  

그 마을에 나고 자랐지만

멀리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영혼

서둘러 흘러간 것은

멀리 시집간 한 여자가

고향이 그리운 나머지

놀러온 것이다 

영혼으로라도 엿보려고      

그리고 나는 좋아진다

일본의 소소한 마을들이 

시냇물이 깨끗한 마을 보잘것없는 마을 

장국이 맛있는 마을 완고한 마을

눈이 푹푹 쌓이는 마을 유채꽃이 가득한 마을

성난 마을 바다가 보이는 마을

남자들이 으스대는 마을 여자들이 활기찬 마을   

―「처음 가는 마을」(정수윤 옮김)     


네 시인의 여덟 편의 시를 느리게 읽어 보았어요. 시 앞뒤에 붙은 말들은 그저 사족일 뿐, 시 자체를 눈으로 읽고 소리 내 읽어 보았으면 해요.     


봄날의책은 그런 시인, 그런 시들을 서두르지 않고, 성실히 내려고 합니다. 폴란드의 시, 헝가리의 시, 포르투갈의 시, 브라질의 시, 러시아의 시, 아랍의 시 등 여러 나라와 언어권의 시들을 놓치지 않고 모아서  ‘봄날’의 아름다운 시정(詩情)을 꿈꿔 봅니다. 고맙습니다.  



"이 브런치 '위클리 매거진'은 스토리펀딩의 "모험을 시작한 작은 책들" 프로젝트와 함께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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