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독일로 이민을 간 한 엄마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녀가 독일 초등학교에 가서 공부가 뒤처질까 걱정되어 선행학습을 시켜 학교를 보내었다. 아이의 담임에게서 전화가 왔다.
"000 어머니. 000이 수업시간에 다 안다고 딴짓을 하고 놀아요. 배울 것을 미리 공부시키지 말아 주세요."
"앗,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공부를 안 시키고 학교에 보내겠습니다."
얼마나 바람직한 모습인가!
현재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도 상반되는 모습이다. 우리나라는 학교 정규교육과정을 학원이나 과외로 먼저 배우는 아이들이 많다. 뭐가 그리 급해서 비싼 돈을 주고 미리 배운다. 그 학생은 수업시간에 딴짓을 하거나 경솔한 자세로 수업에 임한다. 이미 다 배워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만심에 빠져 교과서를 보는 둥 마는 둥 한다. 다들 그렇게 공부하니, 우리 아이만 안 시킬 수도 없다.
우리나라는 왜 이토록 사교육을 과도하게 투입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것 같다. 예전부터 많은 외침과 전쟁 속에서 국가는 백성을 지키지 못한 적이 많다.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 임금은 자신의 안위를 챙기기에 바빴고 백성들은 어떻게든 자력갱생을 해야 했다. 그 과정 속에서 공부만이 살 길이었고, 남들보다 공부를 잘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뼛속 깊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영어, 수학 학원이 이렇게도 많은 나라가 또 있을까? 예체능은 학원을 다니는 것이 이해가 간다. 태권도, 피아노, 미술 등은 아이 혼자 하기보다는 선생님이 이끌어 주어 배우는 것이 좋다. 태권도를 어릴 때부터 하여 체력이 좋아지고, 운동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면 학생 자신에게도 큰 무기가 된다. 피아노를 배우면 다른 악기를 다루는 것이 수월해지고, 음악을 즐기는 삶을 살 확률이 높아진다. 하지만 영어, 수학에 이렇게나 매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예전 이명박 대통령 시절부터 영어가 강조되면서 그 영향이 아직까지 계속되는 것 같다. 당시 각 학교에는 원어민교사가 배치되고, 영어 관련 학원, 캠프 등이 활성화되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영어에 대한 열정과 투자가 줄었지만, 그래도 영어 교육은 계속 중요시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영어유치원, 어학원을 다니면서 아이들은 영어에 노출된다. 웬만한 생활 영어 단어를 알고, 발음도 수준급이다. 엄청난 영어 사교육 투자의 결과물이다.
그렇게 영어를 공부한 아이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 영어 교과 수업을 받는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고, 시시한 단어, 문장이라 수업시간이 지루할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영어 사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초등 3학년 때 처음 접하는 영어가 너무나도 낯설다. 나는 영어가 낯설고 어려워 죽겠는데, 다른 친구들은 너무나도 쉽게 수업을 따라간다. 영어선생님은 어느 수준에 맞추어서 수업을 진행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기본 영어를 이미 다 배워서 알고, 소수의 아이들은 몰라서 어안이 벙벙하다.
난생처음 영어를 공부하는데, 나만 잘 모르고 다른 아이들은 쉽게 따라 하면서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영어를 모르는 나 자신이 점점 움츠려 들고 작아진다. 그러면서 점점 영어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고 영어에 대한 거부감이 생긴다. 그러다가 결국 영포자, 즉 영어포기자가 되어 버린다. 부모들은 나의 아이가 영포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영어학원에 보낸다. 우리 집 애들도 비싼 학원비를 매 달 납부하며 영어를 배우고 있다. 참 소모적이고 안타까운 영어교육의 현실이다.
출처: 블로그, 학사캠퍼스
한글 교육도 그렇다. 교육과정상 초등학교 1학년에 한글을 공부하게 되어 있지만, 이미 한글을 다 읽고 쓸 줄 안다. 유치원 때부터 연필을 잡고, 어느 정도 글씨를 쓰면서 한글을 공부한다. 집이나 학원에서 한글 공부를 하지 않고 1학년이 된 아이는 안타깝게도 부진아가 된다. 한글을 정상적인 시기에 깨우치기 위해 학교에 들어온 1학년은, 자기만 한글을 모르는 바보가 된 느낌이다. 자존감이 떨어지고, 공부에 대한 자신감도 떨어진다. 모두 다 한글을 깨치고 학교에 들어오니, 모르고 들어오는 사람은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된다.
수학도 점점 그런 양상을 보이는 듯하다. 예전에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수학 사교육이 투입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이 표가 났다. 수학 선행학습을 하고, 기계적인 연산 훈련을 많이 한 학생은 수학을 잘하는 학생이 되어 있다. 수학시간에 자신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면서, 수업을 흘려듣는다. 수학익힘책을 빛과 같은 속도로 풀어 버리고, 떠들고 놀고 있다. 수학의 원리를 생각하고 골똘히 고민하는 공부는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수학시간에 그날 배울 수업목표 분량을 함께 공부한 후 수학익힘책을 풀고 매겨보라고 한다. 아이들마다 실력이 천차만별이다. 특히나 연산과 관련된 단원에서 극명한 차이가 난다. 연산 훈련을 많이 한 학생은 금방 풀고 매긴 후 검사를 맡으러 온다. 그 학생의 수학 공부는 내가 더 이상 봐줄 것이 없다. 문제는 그 학생이 떠들고 놀면서 조용히 문제 푸는 학생에게 방해가 된다. 그러면 내가 한 마디 한다.
"자기가 수학 조금 잘한다고 검사 맡고 떠들고 노는 학생은 참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다른 친구가 조용한 분위기에서 열심히 문제를 풀 수 있게 조용히 자기 할 것을 하세요."
수학도 저학년 때부터 사교육이 투입되어 한글처럼 변해가는 것 같다. 1학년 아이들이 이미 수학을 다 공부해 와서 담임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수학은 아이들에게 흥미롭지 못하다. 문제를 풀어라고 하면 금방 풀고, '선생님, 다 풀었어요!'라고 외친다. 그러한 상황에서 수학 사교육을 받지 못한 학생은 문제를 늦게 푼다. 아니, 늦게 푸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속도로 문제를 푼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이 워낙 빨리 다해버리니까 자신은 수학을 못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출처: 포토뉴스, sisafocus.co.kr
영어, 수학을 너도 나도 다 시켜서 학교를 보내니, 안 배우고 온 아이는 상대적으로 뒤처질 수밖에 없다. 학교 오기 전에 영어와 수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피눈물 나는 노력의 결과로 우리 아이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되기도 하고, 뒤처지지 않는 아이가 되기도 한다. 다들 왜 이리도 소모적으로 살까? 너도 나도 시키니, 우리 아이만 안 시킬 수도 없다. '학교 가서 배우면 늦다.'라는 생각에 조바심과 걱정으로 선행을 다들 시킨다.
우리나라도 담임선생님이 학부모에게 '아이에게 왜 선행학습을 시켜서 수업시간에 집중을 안 하고 놀게 하세요? 제발 공부를 먼저 시키지 마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면 좋겠다. 영어, 수학을 선행학습 시키는 시간에 아이와 보드게임을 한 번 더 하고, 아이와 공 한 번 더 찰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아이도 행복하고, 부모도 행복하고, 가정 경제도 나아질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