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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니홉 Dec 13. 2024

아버지, 보고 싶네요.

아버지께서는 추운 겨울에 태어나 추운 겨울에 돌아가셨다.

  음력 11월 12일.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2015년 12월 22일이 음력 11월 12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며 크리스마스가 지나갔던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도 이제는 십 년 가까이 되어 간다. 당시 삼십 대 중반이었던 나는 이제 사십 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당시 한 아이의 아빠였던 나는, 이제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예전 아버지의 모습을 싫어했지만, 그 모습을 닮아 있는 내 모습을 본다.


  나의 아버지는 49년생 소띠이시다. 생일이 12월이셨던 아버지는 소가 겨울에 태어나서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되는 팔자라면서 좋아하셨다. 열심히 일은 안 하셨는지 몰라도, 매일 아침 새벽에 일찍 일어나 목욕탕 보일러 불을 때는 일을 오래 하셨다. 늙어서는 공공근로 일을 하시며, 일 마치고 집에 돌아오셔서 막걸리나 맥주 한 잔 드시는 낙으로 사셨다. 평생을 돈 한 번 펑펑 써보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 하나 사지도 않으시고 그렇게 사셨다.


  아버지가 태어나고 6.25 전쟁이 터졌다. 아버지가 아기일 때 숨어 있으면 울음을 터뜨려 난감한 적이 많았다는 말을 잠시 들었던 기억이 난다. 6.25 전쟁 후 폐허가 된 대한민국.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 제대로 먹지도 배우지도 못하였다. 당시 국민학교였던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셨다고 한다. 비록 배우지는 못하셨지만, 어깨너머로 보일러 기술을 익혀 보일러기사가 되어 한평생 살았다.


  보일러 기사 일을 그만두고, 창원에 오토바이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 잠시 일을 하셨다. 그곳에서 젊은 놈이 색깔을 영어로 모르냐면서, 레드, 옐로도 모르냐면서 무시하여 일을 그만두셨다. 그러면서 나에게 꼭 배워야 한다고. 그래야 사람들이 무시하지 않는다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셨다. 기본적인 영어를 몰라 공장 일을 그만둘 때 아버지의 마음이 어땠을까? 참 서럽고 한없이 초라했을 것 같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고된 일을 마치고 술 한 잔 마시는 것이 삶의 낙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과하게 술을 마셔 엄마와 참 많이도 싸우셨다. 그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그런 남편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였건만, 그런 모습을 닮아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 또한 술을 마시면 과하게 먹고 많이도 싸웠다. 이건 유전인가? 나의 몸속에는 술을 많이 먹고 싶어 하는 유전자가 있나 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술을 좋아하는 유전자. 나의 자녀들에게는 물려주지 않아야 할 텐데.


출처: 블로그, 엔터놀로지

  술을 드시면 항상 '꿈에 본 내 고향' 노래를 부르셨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항상 술을 드시면 그 소절을 푸념하듯 노래 부르곤 하셨다. 객지에 나와 무거운 책임을 지는 가장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버거우셨던 것 같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 사시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항상 김치를 드실 때 잎 부분을 드셨다. 거친 푸른 잎은 아버지께서 드셨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아버지가 그 부분을 좋아하시는구나!' 생각하였다. 내가 커서 김치를 썰어 통에 담아 두고 먹어보니 나도 그 부분을 먹고 있다. 아이들이 아삭아삭한 하얀 부분을 먹을 수 있게 본인은 잎을 드신 것이다. 유독 푸른 부분은 다 아버지 차지였다. 아마 아빠도 맛있는 부분을 먹고 싶었을 텐데.


  갈치구이를 먹으면 뼈가 많은 윗부분을 아버지께서 드셨다. 발려 먹기 어려운 그 부분을 입에 넣고 한참을 오물오물하다가 잔뼈를 뱉으신다. 아이들은 가운데 온전하고 맛있는 부분을 먹어라고 당신은 그 부분을 자처하여 드신다. 아빠도 갈치구이의 통통한 갈치살을 드시고 싶었을 텐데. 나 또한 아빠가 되어보니, 갈치구이를 먹을 때 제일 맛난 부분은 아이들에게 주게 된다. 그래도 나는 뼈가 많은 부분을 발려 먹지는 않는데, 아버지께서는 친히 그 부분을 드셨었다.


  젊은 날의 아버지에 관한 일화를 하나 엄마에게 들었다. 하루는 엄마가 밖에 나갔다 오면서 아버지께 식사를 챙겨 먹도록 밥이며, 반찬을 다 하고 나가셨다고 한다. 그런데 밥을 안 차려 먹고 생쌀을 씹어 먹고 있더라면서. 그때 두 분의 사이가 안 좋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 밥 차리는 것이 귀찮아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아버지는,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스스로 밥을 챙겨 먹지를 못하였다.


출처: 블로그, 이 여자가 사는 법 이 여자가 노는 법

  그러한 분이 할 줄 아는 단 한 가지 요리는 '김치국밥'이었다. 멸치를 몇 마리 넣고 끓이다가 김치와 국수를 넣고, 밥을 넣고 푹 익혀서 만드는 음식이다. 이 김치국밥을 아버지께서는 즐겨 드셨다. 그리고 가끔 우리에게도 해주셨다. 어릴 때는 그 김치국밥이 참 맛이 없었는데, 어른이 되어 먹어보니 나름 맛있었다. 결혼 전 김치국밥을 끓여 아버지와 소주 한 잔 하며 먹던 그 김치국밥이 가끔 그립다.


  울산에 직장을 구하여 자취하던 사회 초년생 시절. 아버지께서 나의 자취방에 놀러 오신 적이 있다. 그때 식당에 가지 않고, 집에서 가져온 반찬과 시래깃국으로 밥을 먹었다. 아버지께서는 그냥 집에서 먹던 음식이 좋다면서, 거기에 씹은 소주 한 잔 있으면 된다면서. 일부러라도 괜찮은 횟집이나 고깃집에 가서 좋은 안주와 함께 술을 먹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시니, 대접을 해드릴 수가 없다. 챙길 수 있을 때 챙겨드리지 못하면 기회는 다시없다.


  아버지는 배우지 못하여 직장을 계속 바꾸고, 노가다에서도 일하며 돈을 버셨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공무원은 꼬챙이에 꽂아놓은 돈이니 얼마나 좋니!' 하며 아버지께서 불안정하게 돈을 버시어 힘드셨다고 한다. 그 와중에 보일러기사가 되어 그나마 다행이었다면서. 한평생 컴컴한 보일러실을 새벽 일찍 가실 때 기분이 어떠셨을까? 추운 겨울에는 정말 새벽부터 나가기 싫으셨을 텐데.


  아버지의 손은 정말 거칠고 투박하였다. 투박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것 같다. 마치 거북이 등껍질 같은 질감의 손이다. 얼마나 막노동과 고생을 많이 하였으면 손이 그렇게 변했을까? 내가 어린 시절, 그 손을 잡고 걸었던 길이 생각난다. 그때 나는 아주 의기양양했었고, 아버지는 조금 부끄러워하신 듯하다. 그 후로는 아버지의 손을 잡은 기억이 없다. 돌아가시기 전에 병상에 누워 계실 때 손이라도 많이 잡아 드릴 걸.


  아버지의 제삿날, 아버지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떠올리며 글을 한 편 적어봤다. 이렇게라도 글로 남겨놓으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더 오래 유지되지 않을까 싶어서. 아버지께서 하늘나라에서는 편안하게 잘 지내시고, 아침에 늦잠을 주무시길. 술은 적당히 드시고, 건강을 잘 챙기시길. 아버지께서 나의 꿈에 나타나, '산다고 고생 많제? 잘 사는 모습 보니 좋네.'라고 웃으며 말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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