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가기 전에 우리 집에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개가 있었다. 그냥 복실이라 하자. 집 마당에 도랑이 흐르고 그 위로 큰 버드나무가 있었다. 여름에는 더위를 식히려고 그 나무 마루에서 수박을 먹으며 앉아 있곤 하였다. 복실이는 내 발밑에 엉덩이를 뒤로 빼고 혀를 쭉 내밀어서 열기를 식히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앞으로 똥차가 지나갔다. 그 큰 차는 폭이 작은 길을 가려고 하였다. 무리수다. 좁다고 안 된다는 나의 손수레를 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전진하다 그만 복실이의 엉덩이에 바퀴가 지나가고 말았다. 그 엉덩이에 똥이 나오면서 복실이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죽은 후의 슬픔은 두 번째 키운 "본드"라는 개의 죽음으로 자세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본드”라는 이름을 가진 그 개는 확실히 기억이 난다. 참으로 나에게 충성스러운 개였다. 내가 학교 운동장의 거리에서 "본~드~"라고 부르면 귀를 쫑긋하고 어디선가 쏜살같이 달려와 오른쪽 팔을 갖다 대면 그 부드러운 혀를 내밀어 내 팔을 핥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던 어느 저녁에 본드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 지나서일까 어느 집 개의 신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개는 우리 집을 향하여 들어오는 거 아닌가!
본드였다. 본드는 우리 집 사방팔방을 뛰면서 난장판을 만들었다. 그러다 결국 내 방에 들어가 책상 밑에 깊이 들어갔다. 가쁜 숨을 쉬면서 슬픈 눈을 내게 보이며 끝내 똥을 싸고 죽었다. 그 당시 쥐가 많아 쥐를 잡기 위해 도처에 음식에 발라 놓은 쥐약을 음식인 줄 알고 먹고 죽은 거다.
그날 저녁에 난 한숨도 못 잤다. 베개는 내 뜨거운 눈물로 적시어 더 이상 축축해서 기댈 수가 없었다. 마치 어른이 된 것처럼 울음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흐늘거리며 울었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개는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어느 날 큰 형님이 시커멓고 윤기가 잘잘 흐르는 독일산 도베르만 종 "라거"라는 새끼 사냥개를 데리고 왔다. 그 개도 상당히 영민했다. 혈통이 있어 이름도 족보에 적혀 있는 "라거"라는 이름으로 지어야만 했다. 어린 라거는 우리 집 거실에서 키웠다. 그러나, 1년 채 됐을까? 금세 송아지만큼 성장한 거다. 더 이상 집안에서는 키울 수가 없었다. 주택에 살던 우리는 옥상에서 키웠다. 차에 태워 같이 드라이브를 하면서 반쯤 열린 창문으로 밖을 보여 주면 신기한 듯 그 큰 눈망울이 깜빡거리며 차 밖을 주시했다.
라거가 사라졌다. 큰 형님이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옥상에 묶어 놨는데 누가 가져간 거다. 이제는 나도 성인이 되어 많은 죽음 속에서 이별을 경험했기 때문에 어렸을 적보다 그다지 슬프지는 않았지만 충격적이었다. 그 이후로는 개를 키울 생각도 정을 줄 생각도 없어졌다. 심지어 지나가던 개조차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아파트 단지, 공원이나 쇼핑몰 같은 곳에서 개와 같이 다니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제는 이런 애완동물 또는 반려동물들을 전보다 많이 키운다.
예전에는 개나 고양이를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며 기른다는 의미로 "애완(愛玩) 동물"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애완동물이라는 말보다 보다 더 친밀한 의미로 사람과 같은 동등한 짝으로 여기고 정서적으로 의지하고자 가까이 두는 "반려(伴侶) 동물"이라고도 부른다.
위의 경험처럼 그들은 많은 즐거움과 슬픔의 기억들을 나에게 선사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그를 애완동물, 반려동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애완동물이라는 말은 그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반쪽짜리 단어이고 반려동물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평생 내가 의지하며 사는 친구가 어떻게 나보다 빨리 죽는가 말이다. 그것도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면서 말이다.
내 마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그들을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자아내는 애환이 섞인 "애환(哀歡) 동물”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