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찬 Aug 03. 2024

애환(哀歡) 동물

초등학교 가기 전에 우리 집에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개가 있었다. 그냥 복실이라 하자. 집 마당에 도랑이 흐르고 그 위로 큰 버드나무가 있었다. 여름에는 더위를 식히려고 그 나무 마루에서 수박을 먹으며 앉아 있곤 하였다. 복실이는 내 발밑에 엉덩이를 뒤로 빼고 혀를 쭉 내밀어서 열기를 식히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앞으로 똥차가 지나갔다. 그 큰 차는 폭이 작은 길을 가려고 하였다. 무리수다. 좁다고 안 된다는 나의 손수레를 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전진하다 그만 복실이의 엉덩이에 바퀴가 지나가고 말았다. 그 엉덩이에 똥이 나오면서 복실이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죽은 후의 슬픔은 두 번째 키운 "본드"라는 개의 죽음으로 자세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본드”라는 이름을 가진 그 개는 확실히 기억이 난다. 참으로 나에게 충성스러운 개였다. 내가 학교 운동장의 거리에서 "본~드~"라고 부르면 귀를 쫑긋하고 어디선가 쏜살같이 달려와 오른쪽 팔을 갖다 대면 그 부드러운 혀를 내밀 내 팔을 핥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던 어느 저녁에 본드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 지나서일까 어느 집 개의 신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개는 우리 집을 향하여 들어오는 거 아닌가!
본드였다. 본드는 우리 집 사방팔방을 뛰면서 난장판을 만들었다. 그러다 결국 내 방에 들어가 책상 밑에 깊이 들어갔다. 가쁜 숨을 쉬면서 슬픈 눈을 내게 보이며 끝내 똥을 싸고 죽었다. 그 당시 쥐가 많아 쥐를 잡기 위해 도처에 음식에 발라 놓은 쥐약을 음식인 줄 알고 먹고 죽은 거다.
그날 저녁에 난 한숨도 못 잤다. 베개는 내 뜨거운 눈물로 적시어 더 이상 축축해서 기댈 수가 없었다. 마치 어른이 된 것처럼 울음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흐늘거리며 울었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개는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어느 날 큰 형님이 시커멓고 윤기가 잘잘 흐르는 독일산 도베르만 종 "라거"라는 새끼 사냥개를 데리고 왔다. 그 개도 상당히 영민했다. 혈통이 있어 이름도 족보에 적혀 있는 "라거"라는 이름으로 지어야다. 어린 라거는 우리 집 거실에서 키웠다. 그러나, 1년 채 됐을까? 금세 송아지만큼 성장한 거다. 더 이상 집안에서는 키울 수가 없었다. 주택에 살던 우리는 옥상에서 키웠다. 차에 태워 같이 드라이브를 하면서 반쯤 열린 창문으로 밖을 보여 주면 신기한 듯 그 큰 눈망울이 깜빡거리며 차 밖을 주시했다.
라거가 사라졌다. 큰 형님이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옥상에 묶어 놨는데 누가 가져간 거다. 이제는 나도 성인이 되어 많은 죽음 속에서 이별을 경험했기 때문에 어렸을 적보다 그다지 슬프지는 않았지만 충격적이었다. 그 이후로는 개를 키울 생각도 정을 줄 생각도 없어졌다. 심지어 지나가던 개조차도 눈길을 주지 않다.

아파트 단지, 공원이나 쇼핑몰 같은 곳에서 개와 같이 다니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제는 이런 애완동물 또는 반려동물들을 전보다 많이 키운다.
예전에는 개나 고양이를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며 기른다는 의미로 "애완(愛玩) 동물"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애완동물이라는 말보다 보다 더 친밀한 의미로 사람과 같은 동등한 짝으로 여기고 정서적으로 의지하고자 가까이 두는 "반려(伴侶) 동물"이라고 부른다.

위의 경험처럼 그들은 많은 즐거움과 슬픔의 기억들을 나에게 선사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그를 애완동물, 반려동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애완동물이라는 말은 그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반쪽짜리 단어이고 반려동물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평생 내가 의지하며 사는 친구가 어떻게 나보다 빨리 죽는가 말이다. 그것도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면서 말이다.

내 마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그들을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자아내는 애환이 섞인 "애환(哀歡) 동물”로 자리 잡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