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新)무예도보통지 2
가끔 동묘에 간다.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서울. 갈때마다 강남에 사는 사람들은 동묘의 풍광을 보고 기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증조할아버지는 홍천 출신으로 강원도에서 약재를 가져다가 서울에 팔아 큰 돈을 버셨다고 한다 - 한때는 명동에도 건물이 있었다고 전해들었다.
그러나 장남인 큰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둘째인 나의 할아버지가 집안 재산의 전권을 가지고 묻지마 투자와 창업을 거듭한 끝에, 집안의 재산은 모두 녹아 사라졌다.
결국 내가 어렸을 때는 이문동에 푸세식 화장실이 딸린 작은 약국만이 남았다. 초등학생 시절 이곳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천장에서 길게 늘어진 줄을 당겼다가 손이 달라붙어 기겁을 하고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내리는 줄이 아니라 파리 끈끈이였다.
어쨌거나 이런 집안 내력 때문인지 나는 이런 올드(old) 서울의 풍경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동묘에서 동대문을 향해 걸어오면서 흡사 백여년 전 약재를 지고 강원도에서 동대문으로 향하는 증조할아버지의 행렬을 상상한다. 하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동대문이 아니라 동묘이다. 동묘 시장은 여러번 구경왔지만 동묘 안에 들어간 건 오늘이 두번째이다.
정문을 지나 관우상이 모셔진 정전에 가기전 두번째 문인 내삼문 근처에서 거의 닳아서 윤곽만 남은 벽화를 발견했다. 어렴풋이 보이는 붉은색 쾌자(조끼)의 모습과 종이봉투 같은 모양의 전건을 보아하니, 임진왜란 발발이후 창설된 ‘훈련도감(訓鍊都監)’의 행렬을 묘사한 그림으로 보인다.
훈련도감은 조총병 위주의 일본군에 대응하기 위해서 명나라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의 편제를 따라 포수(조총수), 사수(궁수), 살수(창,검수)로 이루어진 정예 병력이었다. 소속병들은 일반적인 조선군과 달리 모두 장기근속의 직업군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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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군인들은 소매가 좁은 도포인 '협수' 위에 긴 조끼인 '쾌자'를 걸처입었는데, 이 협수와 쾌자의 배색을 통해 소속부대를 구분지었다. 벽화의 군인들은 무기대신에 징, 북, 동발(銅鈸:심벌즈)등의 악기를 들고있어 군악을 연주하는 취타대로 보인다. 잘 알려지지 않은 훈련도감의 복식이 그려져있는 걸 보니 근대에 그린 그림이 아닌 듯한데, 훼손이 심한 모습이 걱정스럽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1호선과 6호선 환승역인 동묘앞의 ‘동묘’는 삼국지로 유명한 촉나라의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다.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위해 파병온 명나라 군인들을 위무하기 위하여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해인 선조 32년(1599) 공사를 시작하여 2년 뒤 선조 34년(1601) 완공하였다. 명나라 황제 신종(만력제)도 건립을 위해 금 4000냥을 지원하였다고 한다. 야사이긴 하지만 만력제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 선조가 장비의 환생이고 만력제가 유비의 환생이라고 한것이 그가 조선파병을 결심한 계기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전은 그 둘레가 벽돌로 쌓여있어 마찬가지로 중국과 한국이 섞인듯한 형태이다. 정전의 좌우는 아마도 건립시부터 자리를 잡았을 법한 높고 오래된 향나무들이 지키고있다. 그 모습이 다른 한국의 전통건축물과는 다른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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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벽화가 그려진 내삼문을 지나서 갈때마다 언제나 동묘 정문을 지키고 있는 전신에 문신이 가득한 빅토리 강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동묘 밖으로 나선다. 비로소 중고 옷더미와 골동품으로 떠들석한 동묘시장으로 돌아온다.
제길 난 동묘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