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3년차, 비로소 나는 내가 되었다.
싱글맘이 되었다.
사춘기 아이가 둘 있는 나는 3년전 싱글맘이 되었다.
이혼을 화두에 둔 많은 이들의 수많은 추측이 난무했지만, 우리의 이혼에는 그 어떤 추측의 이유도 해당하지 않았다.
흔한 외도, 폭력, 도박, 경제적 위기 등등의 이혼 사유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너무나 진부한 "성격차이"가 정말 우리의 이혼 사유가 될줄은 우리도 몰랐다.
결혼 18년차, 스물넷에 결혼한 동갑내기 부부였던 우리는, 함께 살아가기엔 너무나 맞지 않는 톱니바퀴였다.
남편은 여린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해야하는 보드라운 성격 이면에 자신과 다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다. 나와 다름을 끊임없이 틀림이라고 주장하는 그에게 나는 지쳐갔다.
나는 고지식하고 융통성없는 사람이다. 사랑에 무덤덤하고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 그저 말을 안해도 알겠거니 하는 성격이었다. 이런 나는 그에게 계속해서 마음의 외로움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었다.
미친듯이 싸운 신혼 3년이 지나고 우리의 균열이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어느날, 그 작은 균열은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고, 그 사이로 감정의 봇물이 터져 막을 수 없이 넘쳤다.
법원에 이혼을 신청하던 날, 마치 혼인신고를 했던 그날처럼 서류에 친권과 양육권 지정자를 표기하고, 지급할 양육비의 액수를 적어넣으며 사건번호 XXXX로 이름대신 불리던 그 날.. 우리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혼이라는 절차를 밟고자 온 것을 보며 아연실색했던 것이 기억난다.
숙려기간은 3개월이 걸렸다. 그 숙려기간은 그 어느때보다 길었다.
그 시간 우린 부부도 아니고 남도 아닌채 한집에서 대면대면한 시간을 보내야했다.
미성년 자녀가 있었던 우리는 몇번의 출석을 하며 법원이 이수하라고 한 절차를 이수한 뒤 판사 앞에서 5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동안 몇가지 질문에 대답을 하고 이혼을 승인받았다.
우리의 혼인에 조금도 개입하지 않은 일면식도 없는 판사에게 이혼은 허락을 받아야한다는게 잠시 우스웠다.
그리고 시청에 가져다 내라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꼭 둘이 가서 함께 접수를 해야 한다고 했다.
시청에 가서 서류를 내자 직원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시간 이후로 이 서류는 효력이 발생합니다."
남이 되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이도령과 춘향이처럼 사랑할 줄 알았던 우리는
아들딸 낳고 혼인서약을 했던 것처럼 건강할때나 아플때나 검은머리 파뿌리 될때까지 잘 살겠다고 맹세한 우리는 그렇게 남이 되었다.
18년의 세월이 종이 한장에 남이 된다는 것이 조금은 어안이 벙벙했다.
결혼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면 세상의 올가미를 벗을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홀가분하진 않았다.
대신 내 결혼생활 18년이 파노라마처럼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생각했다.
모든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비로소 나는 누군가의 아내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 돌아왔다.
나에게 결혼은 맞지 않는 옷이었다.
내 옷을 입지 못한 나에게 아내 라는 자리는 며느리라는 자리는 물과 기름처럼 걷도는 자리였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엄마와 아빠가 되어버린 우리는, 제자리를 찾아 떠났다.
우리는 부모로 살기로 결심했다.
남자와 여자, 부부가 아니라 아이들의 엄마 아빠로 살아가는 것으로 족한 관계가 되자, 서로의 쓰나미처럼 몰아치던 감정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3년차 싱글맘이 된 나는 평안해졌다.
지긋지긋하던 고부갈등도, 매일을 전쟁같이 싸우는 모습을 보여야했던 아이들에게 미안한 감정도, 신경성으로 몰려오던 질병들도 나아져갔다.
아이아빠는 자주자주 집을 오가며 아이들을 만났다. 때론 집에서 아이들과 자고가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이혼의 파장을 크게 겪지 않고 사춘기를 넘나들고 있다.
아이들에게 상처가 전혀 없진 않았다. 행여 한부모 가정이라는것을 학교나 친구들이 알까봐 노심초사할때 가슴이 뜨거운 인두에 지져지는 듯한 통증이 훓고 지나갔다.
아이들의 상처가 그 어떤 것보다 아팠다. 우리의 선택으로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이번엔 우리의 선택으로 인해 이혼의 상처를 견디라고 하는것이 어느때보다 가혹했다.
하지만 아빠는 아빠로서의 자리에 최선을 다해주었다.
아빠와 아이가 함께 하는 자리에 동행했고, 아빠가 집에 머무는 것을 때론 연락없이 집에 오기도 하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으며,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연락하는 것도 막지 않았다.
나와의 관계가 단절 되었다 해서 그들이 아이들의 가족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것마저 상처로 남겨주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무엇이 정답이었는지는 알수 없다.
이혼을 하고 감정의 물결이 가라앉으며, 난 조금씩 아이아빠를 이해하는 부분이 생겼다.
그때 내가 너무 냉정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가장의 무게를 조금만 더 따뜻하게 이해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까? 라는 질문을 때때로 내 자신에게 던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은 "No"였다.
사람과 사람은 때론 평행선 같은 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우린 함께 걸어갈수 없는 평행선 같은 사람들이었다.
교차점을 찾을 수 없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공허하다. 억지로 끼워맞춘 톱니바퀴는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상처내며 망가져갔다.
이혼을 하면 남만도 못하다고 하는데, 엄마아빠로 살기에 지금 우리의 관계는 충분하게 여겨진다.
비록 함께 할 수는 없지만 부모의 역할에 서로 최선을 다하고, 아이의 문제를 서로 상의하며 부재의 자리를 메운다. 아이들에게 모든것을 충족시켜줄수는 없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뿐이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그저 그날그날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뿐.
커다란 상처가 될 것 같았던 이혼은 내게 그저 삶에 일어난 많은 일들중 하나로 남았다.
아이들도 엄마 아빠가 더는 싸우지 않으니 그저 주말부부처럼 여기며 자라나고 있다.
어느새 대학생이 되어버린 큰아이와 한창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고등학생 작은 아이는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준다. 그게 가장 고맙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많은 날들에 무엇이 펼쳐질지 싱글맘 3년차인 나는 지금도 잘 모른다.
다만 비로소 찾아온 내 자리에서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고 나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뿐..
이곳에서 나는 그런 나의 이야기를 적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