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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녁설 Sep 26. 2020

그래도 사람 사는 곳

슬기로운 달빛 생활 (4)

오늘의 달빛 생활은 바로 이야기로 넘어가기보다 약간의 질문으로 시작하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을까?'


질문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먼저 관련된 기록물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물들을 통해 유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알려진 것들이 우리가 역사서로 접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역사서들만을 보고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을까를 생각한다면 굉장히 다이내믹할 것이다. 역사에는 굵직 굵직한 얘기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전쟁이 일어났다던지 흉년이 들었다던지...

만약 역사서에 적힌 모습만으로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을지 유추를 해본다면 우리 조상님들은 굉장한 초능력자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많은 업적을 지어 역사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도 역사책에 기록된 그 외의 삶이 길고 다양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변은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았겠지'가 아닐까?

 역사적 업적을 남긴 사람... 대표적으로 이순신 장군도 역사에 실리지 않은 기간의 삶이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삶들은 매우 인간답고 평범할 것이다. 어릴 때는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했을 것이고 좋아하는 반찬만을 가려 먹기도 했을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했을 것이다.

그들의 삶 또한 우리의 삶처럼 사람 사는 삶이었을 것이고 그들이 살아온 곳도 결국 과거에 사람이 살던 곳이다.


난 문경에 어떤 생각을 하고 내려왔던 것일까? 20년 살던 문경이라는 곳을 약 2년 정도 떠나 있었다고 너무 미지의 세계로 생각한 듯하다. 몇 백 년 전의 과거도 사람 사는 곳이었을 텐데... 2시간이면 차 타고 갈 수 있는 문경도 결국은 사람 사는 곳인데.. 그런 사람 사는 곳에서 자란 내가 어느 순간 고향이 낯설어 예민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앞서 (3) 편에서 아무 생각 없이 찍었던 영상들을 그날 밤 가볍게 편집했다. 집에서 뭔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단편적으로 이 이유만은 아니었다. 내 전공은 철학이지만 복수전공으로 광고를 배우고 있었고 학교를 다닐 때 문경에 내려가게 되면 영상편집 연습을 해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그냥 갤러리에 찍어놨던 아무 관련 없는 퍼즐 조각 같은 것들을 내 마음대로 이어 붙였다. 뭐 이때까지만 해도 여기서 영상편집을 전문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은 크게 없었다.


 그 다음날 내가 만든 영상을 어제 친해졌던 그 형님에게 먼저 보여주었다. 영상은 볼품없었다. 그냥 카톡으로 영상을 전송하여 만들면 영상이 깨진다는 사실도 몰랐고 다른 촬영장비 없이 마구 찍은 것들이라 굉장히 많은 손떨림 진동수를 기록했다. 영상에 만보기 채워놓으면 아마 만보를 채웠을지도 모르겠다. 암튼 그렇게 좀 퀄리티가 떨어져서 친해진 형님에게만 살짝 보여주려는 마음도 있었는데 다른 대원분들도 대 영상에 주목해주셨다. 부끄럽지만 뭔가 굉장히 짜릿한 기분이긴 했다.

다들 그냥 영상을 만들었다길래 심심해서 쳐다본 거겠지 뭐~


아무튼 후에 그 영상을 보고 대장님께서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혹시 녁설(본명)씨 프로젝트를 약간 수정해서 전문적으로 영상에 우리 프로젝트를 담아보지 않을래요?"


 약간은 의외의 제안이었다. 심지어 처음에는 책방을 하면서 영상을 간간히 찍어달라는 뜻인 줄 알았다.ㅋㅋ

그러나 추후 다시 얘기를 나누며 이것이 프로젝트 변경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책방에 크게 관심이 없던 나는 당연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책방을 하려면 골치 아프게 이것저것 인테리어도 해야 하는 것이 은근히 큰 부담으로 다가왔고 앞서 말한 내 전공 관련 역량을 키울 기회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냥 쉽게 생각했다. 촬영이야 찍으면 그만인 것이고 편집도 그냥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영상은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고민할수록 머리만 아프고 영상을 구성하는 음향 또한 굉장한 문젯거리다.) 그리고 적절한 이름도 하나 생겼다. '달집자'(달빛 탐사대+편집자)를 줄인 말이다. 이 이름도 다른 분들께 나름의 흥미요소이었던 듯하다.


그렇게 나는 달집자로서의 제2막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프로젝트를 하며 생기는 고독감은 남아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말 트기 시작한 사람은 고작 충청도에서 온 그 형님뿐이기 때문이다. 아직 많이 심심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9월부터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9월이 되기 전 약 2주간의 프로그램은 탐사대원들끼리 로컬을 탐사하며 서로 친해지는 것이 목적인 것들이었다. 그렇게 자기의 별명을 짓기도 하고 그림을 그려보기도 하고 해쉬태그를 만들어 가는 활동을 하며 서로 자신을 드러내는 시간이 조금은 있었기에 사교의 관계가 급진적으로 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한번 공간 DIY 작업을 하기 위해 다 같이 일을 한 적 이 있다. 이 프로젝트 자체가 우리가 0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라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아직은 본격적으로 프로젝트 시작 날짜가 되지 않았기에 갖춰진 것들이 많이 없었고 사무실도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어야 했다. 깨끗한 벽지와 딱딱한 대리석 장판이 깔려 있어 가구를 원하는 대로 놓는 것이 아닌 예전 건물의 벽지를 떼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먼저 벽지를 긁기 위한 도구?를 사러 가기 위해 철물점에 다 같이 걸어갔다. 그때 처음으로 말을 트게 된 사람이 많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땐 어색했지 싶은 사람들도 시작한 지 3일이나 되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서로 나이를 공개했다. korean? 의 특징이지만 첫 만남에서 성명과 (소속) 나이는 기본으로 밝히고 만나는 게 기본적인 룰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나이를 만난 지 3일이나 되어서 밝히다니... 돌이켜 생각해보니 참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본적인 얘기를 나누었다. 좀 더 친해지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도 그냥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로 나에게는 의미 있는 것이었다.


이때 달빛 탐사대를 하면서 다시금 느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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