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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헌윤 Nov 09. 2019

이별 후 배운 한 가지

몸은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아직 지난 몇 달에 묶여있다. 속절없이 죽음을 기다리기나 할 따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현실은 내 마음을 어둡게 짓눌렀다.
수시로 응급실과 중환자실로 아버지를 모셔가며 쌓였던 긴장감과 불안은 그렇게 내 살 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음속 여러 생각과 감정들은 일렁이는 파도처럼 시시각각 다양한 너울과 파문을 그리고 있다. 길을 걷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공부를 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함께 했던 기억들이 무시로 나를 찾아온다.
떨어지는 가을 낙엽에 아버지와 함께 한 추억도 떨어지고, 흘러가는 조각구름에 함께 한 기억이 흘러가고, 귓전을 스치는 가을바람도 여러 상념을 속삭여준다.


지금 글을 써 내려가면서도 떠오르는 큰 기억이 있다.


눈이 내리던 1982년 어느 겨울밤. 아버지는 전기 통닭 3마리를 각각의 종이봉투에 담아 퇴근하셨다. 얼큰히 기분 좋게 취한 상태셨다. 자고 있던 3형제를 모두 잠에서 깨운 후, 갑자기 화장실 대야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잠시 후 팔을 걷어 부치시더니 우리의 발을 일일이 씻어 주었다.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이었다. 평상시 무서운 아버지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자비심이 우러나 있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취중이었지만 그 당시 무엇이 그러한 행동으로 이끌었던 것일까?


정신분석학적으로 내면의 역동을 지금 추론해보면 평소에 무뚝뚝했던 아버지의 무의식에 억압된 감정이나 욕구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그것과 정반대의 행동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반동 형성(reaction formation)’의 방어기제로 생각된다.


아버지 당신의 어린 시절 내재화된 ‘무가치감’, ‘불안’, ‘우울’로 인해 스스로 수용하기 어려웠던 자상함과 인자한 마음을 제어하려는 심적인 태도가 이날은 알코올에 의해 그 봉인이 풀렸던 것이다. 그때의 행위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는 것처럼 먼저 낮아진 자세와 사랑으로 무릎 꿇고 발을 씻겨주던 그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지금 내 마음을 후벼 파는 것은


‘왜 함께 할 땐 좋았던 기억들은 모두 망각하고, 반목과 갈등 속에 지냈냐는?’것이다.


기억의 창고에 좋지 않았던 것들만 쟁겨두었다가 꺼내어 곱씹고, 더 깊이 그것을 묵상하고, 같은 자리에 함께 있는 것조차 피해버렸던 순간들이 너무나 많았다.


√ 죽음


이제 한 줌의 재로 떠나보낸 후 애잔함과 서글픔에 젖는 건 왜일까? 내 기분 내키는 대로 화내고 평소에 잘 챙기지도 않았으면서 왜 갑자기 효자 코스프레를 하는 걸까? 짜증이 밀려든다.


유행가 가사처럼 있을 때 잘하지 못해서 이런 정서에 젖는 것 일까?


소중한 건 잃어버리기 전까진 모른다는 사실은 진리이고 이것이 뼈저리게 와 닿는 요즈음이다.
감사한 마음 없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인간이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있는 것들은 가치 없는 것이고, 공기나 햇살, 물, 중력 같은 정말 소중한 것들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것 같다.


아버지의 사랑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던 아버지의 사랑은 늘 함께 있었고 난 그걸 느끼기에 무지한 존재였다. 나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영혼의 그루터기로 쉼을 주던 공간이었던 것이다.


√ 부재하나 존재하는


어제는 본가 집을 찾았다. 아버지 서재엔 당신의 냄새가 아직 남아있었다. 순간 묘한 감흥이 밀려들었다.


이 세상에 부재하나 냄새는 존재하는 상황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질 수 없는 것이지만 곁에서 살아있는 ‘그것’. 언어적 개념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그것’은 직관적으로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다른 차원에서 내게 메시지를 보내올 거 같은 생각이 순간 들었다.


수호천사로 영원히 내 곁에 머물며 힘들 때 지혜와 길을 안내해 줄 거란 믿음이 마음에 막연히 들었다. 잠시 후 그 울림은 확신으로 각인되었다. 그 증거는 내 눈을 적셔오는 눈물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 눈물은 진실의 징표라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꾸역꾸역 설움과 자책감으로 밀려들었던 그간 심경들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아빠가 나를 위로하고 계셨던 것이다.


√ 나가며


가족과 이별을 경험하고 머리가 아닌 심장으로 배운 것이 있다.
부모든 친구든 가족이든 동료든 또 일이든, 바로 지금 눈앞에 있을 때 잘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소중한 것들을 희생하며 내달리는 삶은 언젠가 후회를 낳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지금-현재일 뿐 과거도 미래도 아니다. 지금 땅을 밟고 접촉하는 모든 것들이 소중한 것이며, 그것들과 피부로 직접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들에 핀 코스모스의 흔들림, 빨갛게 물 든 가을 산, 매일 뜨고 지는 해와 달, 평화롭게 잠자는 아이의 미소 등 우리 주변엔 기적이 아닌 것이 없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타성에 젖은 눈을 열어 직관의 눈을 떠야 할 때이다. 삶의 부침으로 습관성 절망, 냉소에 익숙해졌다면 소소한 일상 속 감사한 것들을 찾으며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현인이든 웃어른이든 그들이 일러준 대로만 살 수 있다면, 지금처럼 회한의 경험을 나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 남은 시간들은 후회가 최소가 되도록 성실히 노력하며 지혜의 말씀들에 더 귀를 기울이며 살 것을 다짐해본다.


그래야 인생이 내주는 수수께끼를 더 잘 풀 수 있을 테니까...

대학원 가을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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