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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헌윤 Dec 03. 2019

I’m OK, You’re OK

나와 타인을 다 함께 인정하는 건강한 사회를 꿈꾸며

(게슈탈트 치료 이론과 교류분석이론의 렌즈로 바라본 연예인들의 자살)

최근 세상을 등지는 연예인들의 비보는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우리에게 기쁨을 선물해 주던 그들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한데, 무엇이 그들을 극단적 선택의 길로 내몰았을까?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손 내밀어 주지 못했음에 무력감이 든다.

세상은 그들의 무의식적 욕구나 감정적 차원의 지하층 마음에 함께 내려가 가슴으로 공감해 주지 못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판단, 평가하기에 급급했다. 세상은 베일에 가려진 그들의 지하층 감정과 고통에 공명할 수 있는 감수성이 없었다.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그들을 더 깊은 늪으로 밀쳐내었다.

우울, 불안, 각종 신경증들은 폭발적인 증가 추세에 있다. 하루 평균 40명이 자살로 세상을 마감하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신 건강에 빨간 불이 들어온지도 오래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허용할 수 없는 옹졸함과 자신의 편협한 시각으로 한 영혼을 재단해 버리는 성급함이 인터넷, SNS의 장에서 횡횡하고 있다. 공감까지는 어렵더라도 ‘그냥 그런 삶도 있구나’,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로 넘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 함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왜 우리는 이렇게 잔인해진 세상을 만들었을까?

지구 상에 전쟁이 사라지길 바라면서도 우리는 삶에서는 전쟁이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우리 안의 폭력성이 우리를 스스로 더 책임감 있게 만든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잘못된 확신과 생각은 우리를 그렇게 행동하게 하고 지배해 버린다.

빈약한 근거, 자신만의 편협한 판단으로 타인을 성급하게 비난하고 매도해 버린다. 주관적 자기 신념을 진실이라 착각하며 타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비난의 댓글은 살인 행위이다.

현대 사상은 개인의 삶의 경험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련의 ‘보편적 진리’로 환원시킴으로써, 개인의 고유성과 모든 사람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했다. 이 의미는 우리 인간은 계속 변화하고, 과학이든 다른 무엇이든 어떤 체계도 경험들을 초월하는 인간을 적절히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하는 말이다.

Fritz Perls에 의해 발달된 게슈탈트 심리치료는 좋거나 나쁘거나 범주화해서 세상을 바라보면 내적 갈등과 대인 관계의 갈등이 증대된다고 보았다. ‘전체 단위’를 말하는 ‘게슈탈턴’은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큰 것이고, 인간은 내재적으로 균형과 완결을 향해가는 선천적 경향성이 있고 부분보다 전체에 따라 사고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즉, 우리 인간의 삶에서 통합과 균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전체론적 접근을 취한다. 세상은 ‘양자택일’이 아닌 ‘양자포함’이라는 시각을 견지한다.

결국 우리가 시시비비를 따지기에 급급하고, 객관적 거리를 두고 전체적으로 세상을 조망하지 않을수록 우린 분열된 마음으로 심각한 정신병리를 겪게 될 수도 있다.
상대의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고 쉽게 단정 짓고, 타인과 나는 분리된 나와 아무 상관없는 존재로 치부해 버린다.

삶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알려면, 먼저 전체론적이면서 몸. 정신. 영성을 포함하는 삶의 원칙을 우선 가져야 할 것이다. 우주는 계속 변화한다. 나와 타인도 계속 변화한다.

장자 ‘소요유’ 편을 보면 작은 물고기 ‘곤’이 변하여 ‘붕’이라는 새가 되어 하늘 연못으로 날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장자는 엄청난 변화의 가능성과 실존적 한계를 초월할 가능성이 우리 인간에게 있음을 선포한 것이다.

아주 작은 물고기 ‘알’에서 거대한 붕새로 ‘변화’되어 비상하는 엄청난 생래적 무한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장자는 본 것이다.

차가운 세상의 폭력적 언어는 타인의 무한한 가능성이 발현되기도 전에, 그들을 깊은 우울과 불안의 늪으로 내몰아 부친다. 우린 무한한 가능성도 지니고 있지만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다.   

내가 누군가를 무책임한 사람으로 본다면 내가 무책임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배려심이 없는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본다면 내가 배려심이 없고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금 판단, 평가, 낙인찍어버리는 상대의 모습은 그 존재의 전체 모습도 아니며, 그의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없는 것들이다. 무한한 잠재력과 변화 가능성을 인정하고 보이지 않는 그 존재의 비전을 조망할 수 있는 아량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정신분석가 해리스(Thomas Anthony Harris)는 그의 저서 ‘I’m OK, You’re OK’를 통해 교류분석 이론(Transactional Analysis)을 대중화시켰다.
교류분석 이론(Transactional Analysis)은 ‘상호 반응하고 있는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교류를 분석하는 이론’으로 사람이 대인관계에서 의사소통하는 기본적인 태도를 연구한 것이다.

그 이론에 의하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 있어서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어떻게 수용하며 대인관계를 맺어 가느냐에 따라 4가지 삶의 모습을 네 가지 보인다고 보았다.

인간관계의 4가지 유형(The Four Life Positions)
(1) 자신은 부정하고 타인을 인정하는 방식(I’m not OK, you’re OK),
(2) 자신만을 인정하고 타인은 부정하는 방식(I’m OK, you’re not OK)
(3) 자신과 타인을 모두 부정하는 방식(I’m not OK, you’re not OK)
(4) 자신과 타인을 다 함께 인정하는 방식(I’m OK, you’re OK)

(2) 번 유형은 지금 한국 사회에 급격히 팽창하고 있는 태도로 판단된다. 타인을 분노와 처벌적 방식으로 대하고,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다른 사람의 능력을 경멸하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닫고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다. 자기보다 잘 되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비난을 퍼붓는다.

갈등이나 실패의 원인을 남에게 전가시키고 늘 남 탓을 한다.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배려가 거의 없다. 성인이 되어서도 ‘I’m OK, you’re not OK’라는 사고로 독선적, 배타적, 자기중심적 태도를 일관하는 것은 심각한 병리적 문제를 지닌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우리 안의 무한한 변화 가능성이 있음에 눈을 뜨고 타인과 나는 분리된 것이 아닌, ‘따로 또 같이’ 연결된 하나의 우주라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할 시점이다.

I’m OK, you’re OK 나와 타인을 다 함께 인정하는 건강한 사회를 꿈꾸어 본다.
나부터도 상습적 판단과 평가의 렌즈를 걷어내야 함도 반성한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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