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스물셋의 마지막 두 달을 앞두고 있다. 보통 밑에 ㅅ받침이 들어가면 해당 나잇대의 중반이라고들 부른다고 하던데, 그럼 스물셋의 나는 이십 대의 중반을 지나가고 봐도 될까.
이십 대의 초반의 성인이 되기 전후의 나의 성격적인 측면-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을 대할 때 나의 다양한 면면이라 해야 할지 변화된 나라고 해야 할지, 이십 대 초반에는 나를 잘 알 수 없어하는 나를 낯설어했더라면, 이십 대 중반에는 나를 낯설어하는 나에게 보다 익숙해진 듯하고 내가 나를 아는 동시에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다음 스텝. 몰랐던 나에 대해 추가적으로 탐색하는 시기를 갖고 있는 듯하다.
어릴 때만 해도 나는 나를 정말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 스스로 나를 너무 모르겠어서 혼란스럽고 당황스럽던 이십 대의 초입. 어릴 적의 나의 모습과 대학 입시를 거치고 성인이 된 후의 내 모습이 자꾸만 상충되는 듯하여 그 사이에서 무엇이 진정 나인가 알 수 없어 나라는 존재는 어떤 사람인가에 관해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곤 했다. 뭔가 대학 입시를 거치는 동안, 나는 어떤 사람인지 보다 내가 해야 하는 공부와 가고 싶은 내지 가야 할 대학에 나를 맞춰서 살곤 했으니까, 공부를 하는 데에 있어서 방해가 될 수 있는 학생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나를 부지런히 지우며 살아갔던 것 같다.
나는 거주지 혹은 주변 환경의 변화를 좋아하고 그 변화에 잘 적응하는 사람이라고 줄곧 믿으며 살아왔는데, 학교를 마치고 성인이 되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알게 되었다. 생각보다 나는 그러한 변화들을 적응하는 데에 있어서 많이 더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말이 더 적당한 것 같기도 하다.
이게 좀 지나친 자기 연민일 수도 있지만, 이 부분을 생각할 때면 왜인지 좀 먹먹해지는 것 같다. 줄곧 내가 이사나 새로운 장소 새로운 학교 등에 가는 걸 잘하는 사람이라고 나 스스로 여겨 왔다는 게, 나도 날 잘 모르면서 안다고 자부해왔던 세월 속 나의 무지가 어쩐지 좀 무심하게 느껴져서 나 자신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다.
많은 이동이 있던 학창 시절, 나는 내가 누구인지에 관해 구태여 질문을 던질 필요가 적었던 것 같다. 이사와 전학을 꽤 다녔고, 새로운 곳에서 잘 적응하고 친구를 사귀기 위해선 내가 누구인가를 앞세우는 것보다 거기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게 그 당시의 급선무였으니까.
물론, 그렇다 해서 학창 시절의 내가 완전히 타인에게 맞춰진, 거짓된 나는 아니었다. 상대방들을 배려하는 그 마음에 앞서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다는 나의 바람이 담겨 있었으니까.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 그것만으로 내 마음이 뜻하는 바는 이미 충족되었기 때문에 더 바랄 게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함께 하는 사람들을 우선하는 것 또한 내 마음을 따라 한 것이기에 그 속에 나는 분명 존재했고 존재한다. 그러니까 그게 뭐였던지 간에, 내 선택이고 그렇기에 나는 나로 있었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내게 나의 호불호를 묻고 찾아가는 게 아직은 좀 어색하고 어렵지만, 때론 그게 식사 하나 고를 때도 무얼 골라야 할지 몰라 무척 복잡해지는 등 이런 내가 나 자신에게도 참 답답해질 때가 많기도 하지만, 지금 차근차근 하나하나씩 배우고 익혀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남들은 이러한 방법들을 보다 더 어릴 적에 익혔을 수도 있고 이 부분에 관해선 내가 조금 늦은 걸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하여 이 늦음이 잘못되었다거나 안타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몇 살 땐 무얼 배워야 해, 그것만이 정답이야와 같은 건 없으니까. 누군가는 a를 먼저 배우고 그다음 b를 배울 수 있는 거고,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누군가는 b를 배우고 그다음에 a를 배울 수도 있는 거고. 또 다른 누군가는 a, b는 각설하고 c를 배울 수도 있는 거고. 다 저마다의 나름이니까. 그 나름이 그 저마다를 형성하고 그 자체로 그 사람만의 빛을 만들어가는 것일 테니까.
세상의 많은 면면들을 보고 커가면서, 나 자신을 세상 속에 참여시키는 동시에 지키기 위해 계산이란 것을 마냥 안 하고 살 순 없겠지. 계산하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적어도 내 사람들에겐 계산 보단 매사에 진심인 사람이고 싶다. 매사에 온 마음을 다해 임하는 사람이고 싶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무엇보다 마음이 그리고 사람이 중요하니까. 그렇기 위해선 나는, 보다 나로서 살아가야겠지.
여기서 보다 나로서 살아간다는 뜻은, 좀 더 나에 대해 넓고 깊게 알아가고 싶다는 뜻이다. 이따금 내가 나에 대한 신뢰가 없고 나를 잘 알지 못해서 이런 내 모습을 보여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에 집중하기보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나도 있어라고 상대방에게 나다운 사람으로 존재해 있는 것. 동시에 당신도 혹시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고 싶은데 이따금 주저되는 때가 있다면 나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견해가 없고 그저 당신을 당신으로 존중하고 있으니 언제든 마음 편히 기꺼이 당신이 편한 대로 해도 괜찮다는 뜻을, 말로는 전달이 부족할 수 있으니 기꺼이 나 자신의 다양한 면면을 보여주며 그 말이 실재임을 전달하고자 하고 상대에게 편한 사람이 되고 싶은 그런.
스무 살 때만 해도, 사람들이 함부로 내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불편한 사람이 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금 편한 사람이 되고 싶고, 나를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 하건 좀 더 있는 그대로 나다워지는 방법을 익혀가고 있는 건, 내게 있어서 큰 의미라 생각한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던지는 무수한 물음 가운데, 나는 그저 나라는 내 안의 울림을 마냥 무수한 메아리 중 하나에 불과한 것처럼 듣다가, 그게 바로 내가 나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에 대한 대답임을.
나는 누구인가, 나 스스로에게 되물을수록 마주치게 되었던 무채색의 공터는 텅 빈 공허가 아닌 얼마든지 무엇이 되어도 괜찮다는, 나는 그저 나란 나의 우문에 대한 깊은 침묵의 꽉 찬 현답이었음을.
예전의 나도 나고 지금의 나도 나고, 나는 그저 나는구나라는.
즉, 물음과 동시에 이미 대답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나는 그저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자세를 갖추고 내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한 첫 시작이자 그 여정의 끝임을. 즉, 나는 누구인가를 결정짓는 갈피는 내가 내 안의 어디에 꽂아 두느냐에 따라 달렸다는 것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이,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닮아가려는 여정이 어쩌면 나에게 있어선 나를 알아가는 데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보는 요즘이다.
나는 그저 나라면, 나는 어떤 나이고 싶은가?
또한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떤 나이고 싶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