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날숨

묵음으로 써 내려간 서한을 품은 새하얀 숨결

by 허수민


- 함께 들으면 좋을 곡 : [ Andre Gagnon - Origam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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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밖이 깜깜했던 이른 아침, 수영 수업을 들으러 가는 날이었다. 현관문을 밀어서 연 다음 딱 세 개의 계단을 내려가는데 촉촉한 차가움 같은 익설은(익숙하고 낯선) 느낌이 얼굴에 내려앉더라. 비가 오는가 하여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비라고 하기엔 느린 걸음으로 나부끼듯, 다양한 길을 통해 땅으로 사뿐히 내려앉는 것들이 있었다. 눈. 눈이었다.


2021년 11월 10일, 올해의 첫눈이 왔다.


오랜만에 마주한 눈이 반가웠다. 하지만 이내 집에 두고 나온 탓에 장갑도 끼지 못한 맨손으로 자전거를 타야 할 걸 생각하니 눈이 내릴 정도의 추운 날씨가, 추위를 뚫고 속력을 내어 나가는 정면으로 부딪혀 올 바람들이 가만히 서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어쩐지 가야 할 길 위로 내려앉은 이른 아침의 어둠이 유독 새카맣게 보이는 것 같더라.

가야 할 길을 두고 잼이 발라진 길 위를 걷듯, 머뭇거리고 미적거리는 발걸음을 느적느적 하나하나 번갈아 떼어가며 주차된 자전거를 찾아 걸어가다가 무심결에 돌린 시야에 들어선 풍경을 보고, 나는 그만 추위를 잊었다.

눈구름이 드리운 짙은 남색의 하늘 뒤로 동이 기지개를 켜는지 이제 막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 아래로, 이제는 빈 초소인 한 경비실 앞을 여전히 비추고 있는 등불의 희미한 웃음빛을 받아 반짝이며 나리는 눈들을 보니 ‘추위, 그까짓 거’ 싶더라. 풀어서 말하자면 눈이 온다는데 추위쯤이야 오브 콜스지(물론이지) 하는 말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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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달리 눈은 닿아도 쉬이 젖지 않지만, 맞닿은 그 순간의 촉촉한 차가움만큼은 선연하여 비와 많이 닮아 있는 듯하다. 내리는 비에 신의 감정 혹은 열렬한 껴안음이 담겨있는 것 같다고 한다면, 내리는 눈에는 신이 건네는 정중한 악수 또는 점잖고도 다정한 포옹이 담긴 것만 같다고 잠시 생각했다. 그저 있음, 그 자체로 정말 수고 많았다고…


쌓일 새도 없이 맞닿은 곳 위에 가만히 앉았다 조용히 스며드는 소소한 눈송이들을 본다. 눈은 세상을 춥게 하기 위해 내리는 것이 아닌,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또 한 해를 지나 보내며 신과 사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들 수고했다는 의미로 눈꽃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추운 겨울이지만 사람들의 마음만큼은 새하얀 눈을 보며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따스한 바람이 담겨 있기에, 시선이나 몸에 눈이 맞닿아 올 때 그토록 포근하게 느껴지는 걸까.


눈을 펑펑 쏟아지는 겨울을 좋아하지만, 겨울에는 어김없이 어느 겨울날 하늘나라로 간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선뜻 겨울이 좋다고 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이 글을 쓰며 문득 새로 든 생각은, 내리는 눈 속에 그 사람들의 안부가 담겨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었다. 먼저 말없이 떠나와서 미안하다고 우리는 잘 있고 당신들도 잘 있었으면 한다고, 그 다정한 안부와 따스한 마음을 점자나 모스 부호로 내리는 눈에 담아 송이송이로 보내오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눈이 내리는 하늘 아래 서서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쉰다. 묵음으로 써 내려간 서한을 품은 새하얀 숨결이 추위를 타고 하늘로 오르며 퍼져간다.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은 어디에서건 모두들 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평안이 되어 하늘에 닿고 이 땅에 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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