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날숨

회색과 파랑

by 허수민


회색과 파랑을 섞으면 새벽의 색이 된다. 새벽의 고요는 회색을 닮았고 새벽의 깊은 눈동자는 밤의 푸름을 닮았다. 어쩌면 새벽에도 운행하는 열차가 있을지도 모른다. 푸른빛을 내며 고요하게 달려가는 열차를 머금는 새벽역이 있을지도 모른다. 운행 시간은 자정부터 새벽녘까지. 새벽녘. 동이 틀 무렵. 새벽녘은 밤이기도, 아침이기도. 이는 저마다의 다름이자 나름.


나는 종종 하늘 올려다보곤 한다. 하늘을 보는 데엔 여러 유무의식적 경우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로 이따금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앞 나의 무능에 답답해질 때 하늘을 보곤 한다. 하늘을 보며 바란다. 이 가운데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능력을 주세요.


밤하늘에 뜬 달과 별을 본다. 새어 보기엔 아득해지는 거리에 있어 티끌 같은 빛으로 닿을지언정, 달과 별은 제자리에서 또렷이 빛난다. 이따금 구름에 가리어 보이지 않는 날에도 달, 별은 그 너머에서 어김없이 반짝이고 있다.


동네에서 했던 등불 축제에서 어느 한 등불 제작자 분의 해설 중 인상 깊었던 게 있었다. 빛으로 도시의 삭막함을 표현해보려 했으나, 어떤 방식으로 빛을 사용해 봐도 빛 자체만을 통해서는 도시의 추위를 표현해 낼 수 없었다는 말이었다.

그래, 어둠은 빛을 보게 할 뿐. 그 어떤 어둠도 빛을 이길 수 없지. 이러한 빛은 밤하늘뿐만 아니라, 낮의 하늘 아래 가리어진 커튼 위로 새겨진 빛 무늬, 강가의 빛 물결, 아름드리나무가 빛을 받아 생겨난 그림자가 벽면 위에서 본인만의 아름다운 연무를 선보이는 순간, 두 눈을 떴다가 감는 그 순간에서도 생각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언제나 그 자체로 총총히 빛나는 진심을 머금은 두 눈동자 속 등에서도 보게 된다. 이 찬란히 강인한 아름다운 빛들을.



반짝이는 별빛은 고양이들의 인사를 닮았다. 고양이들의 인사는 두 눈을 깜박이는 것. 두 눈의 깜박임. 사랑하는 랑의 앞에서 눈을 감았다 뜨는 것. 그건 랑을 믿는다는 표현. 내가 눈을 감은 순간 설령 랑이 나를 공격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까지도 그럴 수 있다고 허락한다는 것.


새벽의 고요는 나란히 서서 묵음으로 나누는 대화를 닮았다. 어느 추운 겨울날, 이제 막 밖으로 나선 두 사람은 내쉰 숨이 새하얀 김이 되어 하늘로 피어 올라가는 것을 함께 바라보다 함께 손을 맞잡고 서로의 얼굴에 부드럽게 올라서는 입꼬리와 함께 피어난 소리 없는 웃음을 통해 애정 섞인 묵음의 대화를 나눈다.

새벽의 고요, 묵음의 대화 가운데 오고 가는 호흡은 캄캄하고 추운 세상 속 새하얀 입김 되어 올라가 하늘에 닿는다. 하늘은 잔잔한 바람으로 나뭇잎을 나부끼며 함께 웃기도, 거센 바람으로 함께 분노하기도, 비를 통해 함께 슬퍼하기도, 새하얀 눈을 통하는 등 제각각의 화답을 보낸다.



언뜻 보면 자연은 변동 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가만한 눈길로 자연을 담아 바라보며 매번 다시금 깨닫는다. 변동 없는 반복처럼 보이는 한결같음은 해와 달이 밤낮없이 쉼 없이 걷고 걸어 그려내고 있는 무수한 궤적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영영토록 쉼 없이 그려내고 있기 때문에 한결 같이 매일이라는 당연하지 않은 시간들이 어김없이 도래해오고 있었구나. 그렇게 매일, 매 순간 하늘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아무리 흉하게 상처 입더라도

끝나지 않는 매일에 꽃다발을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기를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을 수 있는 아침 해가 떠올라

시작은 푸른 빛깔”


- ‘잿빛과 푸름(灰色と青)-[Yonezu Kensi, Masaki Suda] ’ 가사


허수민 : 늦은 김에 제대로 늦고 제대로 쓰자란 생각으로 감히 늦었습니다...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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