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날숨

주먹 쥔 손이, 손바닥을 펼치고 헤엄치기까지

by 허수민


- 쓰며 들은 플레이리스트 : 무성하게 피어나는 서로가 되기를 / 팝송 playlist

( https://www.youtube.com/watch?v=c18tqLkN6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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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팔로 물결을 흐트는 동안 다른 한 팔에 기대어 수면 위의 세상을 바라보며 숨을 내쉰다. 다시 물속으로 고개를 돌려 수영장에 비추이는 물과 빛이 그려낸 물결무늬를 보며 반대 팔을 젓고 그 사이사이 발장구를 치며 헤엄쳐 간다. 이는 자유형, 다른 말로는 크롤(crawl) 영법을 칠 때의 자세이다.


요즘 수영을 배우고 있다. 이전에는 복싱을 배웠다. 수영이 손으로 물을 가르어 밀어내는 일이라면, 복싱은 주먹으로 공기를 뚫는 것에 가까운 듯하다.(실은 이렇게 다시 본격적으로 수영을 다니기는 초등학생 이후로 오랜만이다.) 이전에 복싱을 얼마나 했던가, 햇수를 꼽아 보니, 중간중간 쉬기도 했지만, 스무 살부터 스물셋 중반까지. 자그마치 3년 반이다.


복싱을 처음 접한 건, 중학교 때였다. 무얼 보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중학교 1학년 때 복싱이 너무 하고 싶어서 1년 동안 부모님을 설득했었다. 애원도 하고 편지도 쓰고… 편지 중에는 복싱을 하면 좋은 점들에 대해 이것저것 열거한 것들도 있었던 것 같다. 하다 하다 안 되면, ppt를 만들어서 복싱을 해야 하는 이유에 관해 발표를 해야겠다고 생각도 할 정도로 복싱이 하고 싶었다. 그때 당시 생일 선물로 받고 싶은 걸 물으면, 샌드백이라고 할 정도였으니…(우리 집에 둘 가정용 중 적당한 게 없어서 살 순 없었다.)


복싱 글러브가 멋져 보였고, 날렵하게 주먹을 피하는 모습이 마치 천하무적처럼 느껴졌었다. 어떤 공격이든 다 피해내는 무적이라니. 어릴 적 무술이나 복싱 영화에서 때리는 모습보다도 날아오는 주먹을 조금의 몸짓으로 가볍게 피해 버리는 모습들이 정말 멋져 보였다. 멋지게 때려 보고 싶다는 생각보단, 나도 멋지게 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 내게 복싱이 특히 멋져 보였던 건, 잘 때리기 때문이 아니라 총알 같이 날아오는 주먹을 그 찰나에 약간의 고갯짓으로 피해낸다는 게 정말이지, 소위 말해 간지 나 보였기 때문이었다. 굉장히 멋진 호신술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렇게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 오랜 설득 끝에 아빠 몰래 엄마와 협상을 보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복싱을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여름방학 끝자락에 이르러선 나 혼자 하고 있었고, 또 어떻게 하다 보니 여름 방학 때까지만 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왜 그만두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스무 살. 고등학교 졸업을 마치고 재수를 시작하게 되면서, 체력 관리라는 명목으로 운동을 알아보게 되었다. 학원에 가기 전 운동을 하고 갈 수 있는 체육관을 알아보려고 이것저것 검색했을 때, 그때 당시 헬스장을 제외하고 새벽같이 문을 여는 곳이 노원에는 딱 한 곳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뮤직 복싱 체육관이었다. 전통 복싱을 가르친다기보다, 빠른 비트의 음악에 맞추어 복싱 동작을 수행하는 운동을 주력으로 하는 곳이라 일반 체육관과는 달리 내가 처음 다닐 당시에는 샌드백도 없었다. 전통 복싱을 제대로 배워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으나, 뮤직 복싱도 그 나름으로 재미졌기에 뮤직 복싱을 벗 삼아 다사다난하던 재수 시절도 잘 견뎌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스물셋 중반. 뒤늦게 내 골반에 문제가 있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내가 조심해야 할 관절 부분을 어쩔 수 없이 많이 써야 하는 운동 종목 중 하나에 해당하는 복싱을 그만두게 되었고, 비교적 골반에 무리가 적은 운동으로 수영을 택하게 되었다. 수영을 시작하기 전 잠시 새로운 운동을 찾아보며 걷기 운동을 했었는데, 이따금 그저 빠르게 걷는 것에도 무리가 되는 느낌이 들 때에는 다소 암담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론 지금에 감사하다. 내가 생각 이상으로 수영하는 걸 좋아했더라. 이따금 바다에 갈 때면, 혼자 바닷속에서 서너 시간을 놀기도 했으니 어떻게 보면 이제껏 몰랐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만약 내 골반에 이상이 없었다면, 수영하는 걸 이토록 좋아했단 사실을 오래도록 어쩌면 영영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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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을 다니던 3년 반이란 시간 동안, 복싱에 한 부분에 있어서만 해도 참 많은 변화가 있었구나 싶다. 오래인 듯하면서도 너무 길진 않은 기간 동안, 여러 선생님들이 함께 운영하던 체육관은 한 선생님이 맡게 되고, 그 사이사이 여러 회원분들과 안면을 트게 되었고, 밤 운동 끝내고 먹는 하이볼과 감자튀김 만남의 맛남도 알게 되고, 코로나의 여파로 인해 다니던 뮤직 복싱장이 사라지게 되면서 다른 전통 복싱장을 다니다가 이제는 마무리 짓고 수영을 배우고 있구나. 그리고 그 수영이 내게 참 잘 맞는구나, 신기하고 감사하다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런 세월의 예기치 못한 일들이 내 생에 내어준 선물은, 직업과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학창 시절 내가 꿈꿔 왔던 직업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이 길을 걷고 나서 깨달았다,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자 결심한 뒤로 글쓰기가 쉬운 적은 거의 없었지만, 내가 이 일을 원했음을. 아니,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은 글쓰기였음을 세월이 데려다준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또한 세월이 랑을 만나게 해 주기 이전의 나는, 사랑에 있어서도 심각하게 문외한이었다. 여전히 많이 모자라고 미숙한 나라, 이전보다 성장했다고 감히 장담할 순 없으나, 그래도 이젠 이것만큼은 확실히 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사랑이며 내 안의 랑을 향한 사랑을 인식하기 전부터,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랑을 사랑해왔었다는 것을. 랑을 지금도 정말 많이 사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나의 영원을 다해 오직 랑, 이 사람만을 영영 사랑하리란 것을.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그 사이사이에 새겨진 지나쳐 온 순간들을 돌아볼 때면, 새삼스럽지만, 세월이란 건 예상할 수 없는 거구나 싶다. 그렇기에 나는 매일에 있는 소중한 지금에 대해, 그 당연하지 않음에 매 순간 깨어 감사하며 어떤 세월의 물살 속에서도 지금에 있는 소중한 랑을 지키고 싶다.


어릴 적 나는 내 계획대로 세월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나를 이끄는 물살을 버티고 서서 주먹으로 물을 자주 내려치곤 했다. 칼로도 베어지지 않는 세월의 물을, 주먹으로 뚫어내고자 하였으니…

그 후로도 세월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예기치 못한 물살들을 여러 번 마주해 왔고, 그 물살들은 나를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갔으나, 그곳이 바로 내 마음이 진정으로 헤엄쳐 살아가고자 하며, 몸보다 마음이 앞서 머물러 헤엄치고 있던 곳이었더라는 것을. 예기치 못한 세월의 물결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는 것을. 물살에 몸을 맡기고 마음속으로 지향하는 곳, 보고픈 랑이 있는 곳을 향해 하루하루 온 마음을 다해 손을 펼쳐 헤엄치다 보면 닿아 있을 것이란 걸. 분명.


매일의 유일한 지금들이 이루고 있고 맞닿아 이뤄갈 내 모든 세월에 대해 감사하다. 세월이 내보이는 물결을 따라 손을 펼치고 열심히 헤엄치다 보면 랑에게 맞닿아 있는 그 지금들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꼭 닿을 것이다.


이 지금의 그 모든 지금들에 감사하며



허숨 : 늦어서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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