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릭스 leex Dec 29. 2022

마흔의 췌장을 부탁해

건강관리에 '설마'가 어딨어?

국민학교 5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엄마를 찾았다. 다음날 체육시간에 쓸 배구공을 가져오라는 선생님의 지시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학생에게 체육기자재를 가져오라 한 건지 아리송하지만, 반장이라는 완장을 차고 책임감에 불탔던 11살의 국민학생은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다.


집안의 공기는 평소와 달랐다. 안방에서 어른들의 목소리는 두런두런 들리는데, 나의 인기척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엄마! 나왔어요."

가방을 마루에 부려놓고 목청을 높였다. 그제야 안방문이 빼꼼히 열리고 엄마가 나왔다. 열린 문틈을 통해 후끈 전해지는 열기, 누가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아버지와 외삼촌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선생님의 지시가 먼저였다.


"엄마, 선생님이 배구공 사 오래요."


엄마는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쏴아' 물이 틀어지는 소리가 나고, 5분, 10분이 흘러도 엄마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엄마! 배구공 사야 된다니까."


그 뒤로도 약 10여분이 더 흘렀을까? 여전히 눈이 붉은 엄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엄마는 조용히 부엌 찬장 위에 손을 뻗어 5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고는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다.


엄마의 붉은 눈, 안방에서의 열기, 평소와 분명 다른 공기가 마음에 걸렸지만 내 미션을 완수하는 것이 먼저였다. 문방구로 달려가 새하얀 배구공을 사들고 돌아오는 길은 상쾌한 기분까지 들었으니까.


그해 우리 집은 경매에 넘어갔다. 삼촌에게 선 보증이 잘못되었고 아버지가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다행히 집은 재경매로 되찾았지만, 그 이후의 집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새로 시작한 사업이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으면서 집안의 분위기는 대체로 뒤숭숭했었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더 젊었을 서른 후반에서 사십 초반의 아버지는 엄마와 세 남매, 그리고 할머니까지 부양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밤잠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을 것이다.


건장하던 아버지의 몸이 어느 날부터 쪼그라들었다. 밤에 자다 말고 주전자째 물을 들이켜는 모습을 보고 무슨 일까 조마조마했던 기억. 하얗고 팽팽하던 얼굴은 검고 탄력 없는 낯빛으로 변해버렸다. 그 무렵 아버지는 당뇨병 진단을 받았다.


당뇨라는 병이 무서운 것은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이다. 췌장의 기능이 완전히 망가져버리는 것인데, 이를테면 불에 세포조직이 모두 타버려 제 기능을 영구히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다면 쉽게 이해가 될까?


당뇨병에 걸렸다고 당장 죽는 것은 아니지만, 췌장은 우리 몸에 소화효소와 인슐린을 분비해 체내에 들어온 당분을 조절하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췌장이 망가진 상태로는 살아갈 수 없다. 평생 췌장의 역할을 대신할 무언가를 찾아내야 한다. 죽을 때까지 주사를 맞으며 인슐린을 인위적으로 넣어주는 각고의 삶으로 돌변한다.


 '그까짓 거 하면 그만인지' 싶겠지만, 그 관리란 것이 상상 이상으로 고되다는 사실을 아버지를 통해 목격한 후 당뇨병이란 놈이 무서워졌다. 체내에 째깍째깍 작동이 시작된 시한폭탄 하나를 안고 살아가는 심정이랄까? 평소 먹는 것을 즐겼던 사람이라면, 음식을 보고 참아야 하는 고통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3년 전의 퇴사는 내게 구원줄이나 다름없었다.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받고 그것을 풀겠다며 거의 매일을 술로 살았던 한 때, 그 생활을 지속했다면 지금쯤 내 몸상태는 어땠을까? 이미 곳곳에서 심상찮은 시그널들은 나타나고 있었다. 공황장애라는 정신적 문제부터, 고지혈증이니, 고혈압이니, 대사증후군이니 각종 성인병의 징조가 하나 둘 고개를 쳐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 자연히 술이 줄었다. 담배는 원래부터 하지 않았다. 남아도는 시간을 채우기 위해 아침의 시작을 40분가량 되는 맨손 운동으로 시작한다. 규칙적인 생활이 지속되면서 몸의 각종 문제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런 변화 때문이었을까? 삼십 대 후반에 아버지의 삶을 집어삼켰던 당뇨병은 찾아오지 않았다. 유한한 인간의 생애, 시간이 흐르면 신체는 차츰 노화되고 그 기능을 잃게 되겠지만 그 시점이 너무 빨리 찾아오는 일은 불행 그 자체다.


"...애비가 돼서 건강관리 안 하는 건 인정 못해! 열심히 일한다는 건 당신 자신도 포함되어야 하는 거라고!"


드라마 미생에서 김 부장이 오 과장에게 건넨 애정 어린 일침처럼 마흔이 넘은 시점에 건강관리 안 하는 건 인정할 수 없어야 한다. 고혈압, 고지혈, 당뇨 하나쯤 열심히 산 중년의 징표처럼 내세울 일도 아니다.


췌장이 몽땅 불타버린 후 '조심하지 그랬어?' 라는 타인의 위로를 들어봐야 제 손해다.



작가의 이전글 이 길이 맞나? 턱! 막힐 때 읽는 두 남자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