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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Jan 12. 2023

아무튼, 철들지 말라

"철 좀 들어라!"

나는 이 말이 싫다


"나이 값 좀 해라!"

이 말도 그렇다.


마치 '사회가 정해 놓은 정답이 있으니 나 따위는 죽이고 살라!'는 강요와 협박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야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초등학교 코찔찔이 시절부터 만화책을 좋아했다.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나? 싶겠지만, 만화영화에는 열광해도 종이로 보는 만화책에 빠지는 아이들은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8~9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는 만화책을 보는 아이들에게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라며 머리를 쥐어박기 일쑤였으니 대놓고 만화책을 취미로 즐기는 간 큰 어린이는 많지 않았던 듯싶다.


그 시절 황제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이름이 독특하기도 했지만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그 친구가 기억나는 이유는 만화책으로 가득한 녀석의 방 때문이었다. 벽면을 두른 책장, 그 안에 보물섬이나 소년중앙, 어깨동무 같은 월간 만화잡지들은 물론(주간지인 아이큐 점프는 훨씬 이후에 나왔다) 당시 일본만화인지도 몰랐던 시리즈물들(권법소년, 용소야 등)과 아기공룡 둘리, 달려라 하니, 날아라 수퍼보드, 꺼벙이, 로봇찌빠, 맹꽁이 서당, 고인돌, 탐험대장 떡철이 시리즈 등등 온갖 만화책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마치 평생을 찾아다니던 보물섬에 상륙한 것 마냥 황홀경에 빠져 잠시 넋을 잃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던 그 친구의 집에 어떤 이유로 가게 됐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만화책에 대한 공통 관심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용돈도 궁한 데다 만화책 하면 인상부터 쓰고 보는 부모님 영향으로 몰래몰래 한 두 권씩 사모아 책상 한켠에 숨겨 두었던 내 사정에 비하면, 녀석의 방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황제의 방이었다.


아무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으로 돌아가는 내 두 손위에 만화책 몇 권이 들려 있었다. 여차저차 가장 읽고 싶었던 몇 권을 빌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집에 오는 길이 어찌나 즐겁고 기대되는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아버지에게 걸리지 않고 무사히 읽고 가져다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던 것 같다.


추운 겨울, 빌려온 만화책을 방에 풀어놓고 동생들과 이불을 뒤집어쓰고 귤 까먹으며 넘겨보던 만화의 추억. 결국, 아버지에게 들켜 된통 혼이 나고(대체 왜 혼나야 하는지 지금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동생들은 내복바람으로 쫓겨나는 비극적(?) 결말로 이어졌지만, 만화책이라는 유년시절의 아이템은 온통 밝고 웃음 나고 가슴이 뛰는 몽글몽글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성인이 되어 직장 생활을 하게 되면서 마음 한구석엔 늘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만들어 보겠다는 열정이 있었다. 기존에 하던 것 말고, 새롭게 이런 방식으로 해보면 어떨까? 공상하고 상상하고 스토리를 만들어 입히려는 습성도 분명 만화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마침 맡은 일도 조직문화나 HRD 등 담당자에 따라 얼마든지 제 의견을 낼 수 있고 새로운 도전을 해볼 수 있는 분야라고 여겼기에 새로운 형태로 도전해 보는 일이 많았다. 사장이 바뀌고 경영철학이나 키워드가 내려오면 그것을 이리저리 굴려 새로운 키워드를 만들어내고 그에 따른 프로그램을 짰다.


이를테면 열정, 혁신, 민첩이라는 키워드가 주어지면, 이것을 비(飛) 타(打) 민(敏) 으로 바꿔 브랜딩을 하는 식이다. 그에 맞게 프로그램을 찾아 갖추고 보니 훨씬 체계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선 쉽게 접할 수 있게 된다.


특히 BeaN이라는 조직문화 프로젝트가 가장 기억에 남는데, Be all New 모든 것을 새롭게 바꿔보겠다는 컨셉을 정하고 첫 글자를 따 BeaN 이라는 씨앗 형태의 상징 로고까지 만들었다.



그 이후 심고(Seeding) -> 키우고(Growing) -> 결실을 맺는(Fruiting)의 process를 이미지화해 각각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쉽고 재미있게 만들어 보겠다는 열정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했던 기억.


BeaN 프로젝트는 다행히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약 2년여간의 운영 끝에 그룹 전체에서 베스트프랙티스 상을 받기도 했고, 관계사 6곳에서 프로그램을 벤치마킹 하겠다며 찾아와 진행 Tool 샘플을 얻어가기도 했다. 그중 몇몇 관계사는 자신의 버전으로 BeaN 프로젝트를 응용해 큰 성공을 거뒀다며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16년 직장생활 중, 아니 인생 전체에서 가장 보람차고 기억에 남는 한 때를 이야기하라면 주저 없이 이 시절을 꼽을 테다.


그 후 회사를 그만두고 나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 위대한 스토리텔러가 되겠다는 뒤늦은 꿈을 꾸게 된 이유도 분명 어린 시절의 만화책과 창작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됐을 것이라 믿는다.


저 유명한 픽사의 창업 멤버이자 위대한 애니메이터인 존 래시터는 평생 유치하게 살기로 작정한 사림이었다. 영원히 철들지 않기로 결심하고는 사회적 지위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살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업무용 책상을 온통 장난감과 유치한 물건들로 가득 채우고 어린 시절의 호기심을 잃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그가 지위에 걸맞은 위신을 세우려 했거나 나잇값을 했거나 철이 들기로 작정했다면 토이스토리는, 코코는, 월-E는, 인사이드 아웃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토양 자체가 척박하고 험한 곳에서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가 쉬이 자랄 리 없다.


나는 여전히 수시로 만화책을 읽고, 애니메이션을 즐기고, 장난감 가게를 찾는다. 아이와 칼싸움을 하고 총싸움을 하고 어린 시절 즐겼던 게임을 함께 하기도 한다.


누군가 "나잇값 하라"  "철 좀 들라"

고 한다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웃으며 말하겠다.


"싫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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