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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Jan 17. 2023

무책임한 위로가 다 무슨 소용이야

3년 전 회사를 그만둔 직후 위로를 꽤나 받았다.

가족, 친구, 하다못해 이곳 브런치의 수많은 타인으로부터...그들의 진짜 속마음이야 어떻든 위로를 받는 입장에서 그저 고마움이 컸다. 약 두 달간 괜한 감상에 빠져서는 전철을 타고 어린 시절 나고 자랐던 동네로가 하릴없이 걷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비극적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입술을 앙다물고 마음을 다잡으며 전의를 불태우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됐다. 누군가의 위로를 받고 마음을 추스르고 의지를 다지는 일,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세상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돌아가고 있었고 나는 그 시스템에서 튕겨져 나와 홀로 동떨어진 실업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비단, 퇴사라는 인생에 몇 없을 굵직한 이벤트가 아니라도 위로받고 싶은 날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인지 한동안 서점가에 위로의 글들이 넘쳐났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둥, 지금 힘들면 그냥 쉬라는 둥, 그 정도면 잘해왔다는 둥,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는 둥 밑도 끝도 없는 자기 연민과 맥락 없는 위로의 홍수. 그리고 이어지는 행동 없는 다짐들


문득,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느라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치고 누군가의 위로가, 격려가 필요할 만큼 밀도 있는 삶을 살아왔을까? 싶었다. 정말로 회사는 총알이 빗발치고 폭탄이 여기저기 터져대는 전쟁터나 다름없고 밖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 극강의 연옥지옥이라서 하루하루 고통과 스트레스로 질식할 것 같은 일상을 살아왔던가?


P대리의 하루를 따라가 보자.

출근시간, 회사 인근 스타벅스에 들러 아아를 그란데 사이즈로 사서 챙겨 들고 8시 50분에 사무실에 들어온다. 일단 가방을 내려놓고 PC를 켜고 로그인을 한다. '띠링~굿모닝!' 득달같이 사내 메신저 대화창이 팝업 한다. '오피스베프'로부터 tea time을 가장한 수다 요청이 오고, 자리를 잠시 비운다. 짧으면 10분, 길면 2~30분의 수다타임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오면 어느새 10시가 목전. 팀 미팅이 없으면 간밤의 e 메일을 처리를 한다. 말이 일 처리지 대충 훑고 쇼핑몰로 들어간다. 장바구니를 클릭해 요 며칠 검색해 넣어두었던 물건들을 살까 말까 고민하다 어? 어제 13회 차 남주의 양다리 현장을 들켜 버린 넷플릭스 드라마 리뷰가 눈을 사로잡는다. 기사를 검색하고 어제의 스토리를 음미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오늘은 구내식당 말고 힙지로에서도 핫하다는 텐동을 먹기로 했다. 오피스베프 중 한 명이 먼저 나가 줄을 서기로 했다. 20분 정도를 기다려 점심을 먹는다. 음식 사진과 셀카가 포함된 인증 사진을 찍은 후에야 밥을 먹는다. 식사 후 근처 폴바셋에 들러 아아를 투고로 들고 나온다.

2시부터 3시 사이 졸음이 쏟아지는 마의 구간을 지나고 나면 잠시 잠깐 분주한 시간이다. 이때야말로 회사원의 정체성이 온전히 드러나는 시간, 아! 그런데 집중 좀 했다 싶으니 어느새 5시 30분. 이런 퇴근 준비를 해야 한다. 야근이 없다면 6시 10분~20분 사이에는 대체로 퇴근을 한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퇴근 후 술 한잔은 선택이다.

잠자리에 눕기 전 인스타에 접속하고 오늘 하루를 정리한다. 텐동과 폴바셋 아아 사진을 올리고 #힙지로 맛집 #전쟁터 같은 직장 #잘 버텼다 #개xx김 과장! 따위 해시태그와 감성을 담은 짧은 글을 첨부한다.  


삶은 그 자체로 위로가 필요한 고단함의 연속인 것일까? 왜 현대인들은 그럭저럭 '견딜만한' 하루를 보내고도 불특정 다수에 자신을 드러내고 공감과 위로 그리고 격려를 바랄까? 사람에, 일에, 회사에, 매일같이 쏟아지는 각종 사건사고에 지치고 지치는 걸까?


실체 없는 무차별적 위로의 니즈는 역시나 실체 없는 전쟁터와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영웅의 귀환 스토리에 대한 열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사무실에서 최선을 다해, 주체적으로 하루를 꽉 채워 살 생각은 별로 없지만(진짜 영웅이 되려는), 나의 하루는 다른 누구보다도 고되고 번아웃되기 일쑤니 누군가는 그걸 알아채고 열렬히 위로해 줬으면 해! 라는 욕망. 나름 풍요롭고 여유롭고 이만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이지 싶다가도 하루가 저물 무렵 괜한 감성에 빠져 비장한 삶을 거칠게 살아가는 주인공으로 빙의하고 싶은 선택적 이중 심리 같은 것 말이다.


나 역시 그런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지나고 보니 마음이 너그러워진 탓인지는 몰라도, 그 정도로 전쟁터니 지옥이니를 담기에 민망한 수준 아닌가? 싶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무신경하게 살아가면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꿨던 것 같기도 하다. 실은 딱 그만큼, 내가 한 만큼의 인생을 살뿐이었지만 어쩐지 매스컴에서, 술자리 옆사람들에게서 '회사는 전쟁터'네 '밖은 지옥이네' 라는 클리셰가 들려올 때마다 그래 나 역시도 뭔가 억압당하고 불합리한 일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 것 같기도 하다. 감정의 과잉을 강요하는 세상에 속기라도 한 것처럼.


정말, 전쟁터니 지옥이니를 입에 담으려면 강제로 타국에 끌려가 빛도 없는 암흑의 갱도에서 찌는 듯한 열기를 피해 팬티 한 장만 걸치고 가축사료 같은 한 끼 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16시간 이상 곡괭이질을 쉬임 없이 해야 했던 100여 년 전 군함도 현장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 상태로 지내온 지난 3년은 어땠을까? 오전 7시 반에 일어나 밤 12시에 잠들 때까지 점심, 저녁 각 2시간을 제외하고는 꾸역꾸역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 사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폭풍은 끝도 없이 일었다 잠잠해지길 반복했다. 16년의 직장생활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한 내적 갈등과 감정의 부침, 하루에도 몇 번씩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과 장밋빛 끝그림 사이를 토 나오게 오가는 좌절과 희망의 연속.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역시 전쟁터와 같았다 하기엔 턱없다. 앓는 소리를 반복해봤자 허울뿐인 위로의 기간이 끝나면 "네가 선택한 길" 이라는 서늘한 현실의 언어가 내게 돌아올 뿐이었으니까. 반면 분명해진 것은 지나고보니 이 역시  견딜만한 수준이었고 하나의 작은 성취를 이룬 이후부터는 하루하루를 별다른 목적의식 없이 꾸역꾸역 견뎌내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 몸과 마음을 한계까지 밀어붙일수록 번아웃은커녕 한발 앞으로 나갔다는 쾌감, 그것을 성취감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엔 뭔가 아쉽다.


외려 3년 전의 결정이 없었다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어제에 대한 끝없는 후회와 내일에 대한 불신 속에 스스로를 몰아넣고 답도 없는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위로와 격려를 갈구하며.


"...은지 그 친구한테 자기계발서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이야기를 매일 해줬어. 야간 대학을 가라. 꿈을 꿔라.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열심히만 하면 길이 보일 거다... 대책 없는 희망이, 무책임한 위로가 다 무슨 소용이야..."


드라마 [미생]에서 오 차장은 장그래의 계약직 전환을 두고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괴로움을 토로했다. 오 차장은 고졸 계약직 장그래에게 대책 없는 희망 따위 품지 않도록 "안될 거다!"라고 확인해 주었던 참이다.


그 정도면 괜찮아. 잘 버텨왔어. 더 힘내지 않아도 돼. 열심히 하지 않아도 돼


언제부턴가 빈번해져서는 뱉는 즉시 파편이 되어 공기 속으로 사라지는 위로의 말들. 정작 진짜 전쟁터에, 지옥에 빠진 이들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언(無言)으로 침잠(沈潛)할 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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