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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Mar 09. 2023

나는 나르시시스트다

자기 인식에 대하여

나는 나르시시스트다. 우리말로 하면 자기성애자 정도 될까?

기본적으로 이기적 성향이 강하다. 공감능력도 썩 좋지 않다. 나르시시스트였다 라고 과거형으로 말하기엔 여전히 자기애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 타투처럼 선명하다.


고백하자면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모르고 살았다. 손이 귀한 3대 독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자라면서 나라는 우주는 점점 폐쇄적이 되었던 모양이다. 큰 실패도 성공도 없었던 2~30대의 청춘, 어쩌면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진지하게 돌아볼 기회를 원천 박탈 당했는지도 모른다. 결정적 패착.


애초에 가족을 제외한 타인과의 교류에 큰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초중고 시절 마음을 나눈 절친도 몇 없었고, 대학시절에는 일관되게 주류로부터 소외되었으면서 자발적 아웃사이더라는 말장난으로 스스로를 추켜세우며 관계의 빈자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느 순간 아쉬울 것도 부족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내 안의 나르시시즘을 더 공고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군대에 입대하고 난생처음 집을 떠나 집단생활을 하게 되면서 내가 만들어온 관계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됐다. 성장배경이 천차만별인 전국 방방곡곡의 또래들이 모여든 훈련소에서의 강렬하고도 이질적인 경험. 이마저도 서울 사당역 인근 사령부에 자대 배치(심지어 집과는 버스로 10분 거리)를 받고 본부 행정병이라는 꿀보직을 맡게 되면서 어렵게 머리를 쳐든 나 라는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뒤켠으로 밀려나 버렸다.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차라리 영하 20도가 넘는 최전방에 배치 돼 몸으로 굴렀더라면 자기애의 봉인을 조금 더 빨리 풀 수 있었을까?


대학 졸업 후 남들보다 1년 늦게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취업 준비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 여기저기 서류 광탈 소식만 받은 데다 첫 손자를 끔찍이 아끼던 할머니가 자리에 눕고 그 기간이 길어지며 병수발을 1년 가까이하게 된 것이다. 


원체 자기밖에 모르던 성향에 내리사랑에 비할 수 없는 손자의 보살핌이 오죽했을까? 할머니를 더할 수 없이 사랑했음에도 그 병수발이 지긋해질 즈음. 거짓말처럼 모든 상황이 끝나버렸다.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약 1주일 후 첫 직장의 합격 통보가 들려왔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를 단단하게 둘러쌌던 우주의 경계에 약간의 실금이 생겼고 그 틈으로 조금씩 나란 인간은 뭔가?라는 존재의 의문이 별똥별처럼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자기 자신도 제대로 모르던 자기성애자가 맡은 일은 HR이었다. 사람을 가려내어 뽑고 적절한 업무를 배치하는 일. 첫 5년이 어떻게 흘렀는지는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어찌어찌 그럭저럭 적응해 대리로 승진했고 여유가 생기자 비로소 주변이 조금씩 보이면서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뭔가 달라져야겠다 마음을 먹고 팀원들과 술자리를 적극적으로 가지려 노력했다. 다행히 그 노력은 효과가 있었다. 여전히 특정 팀원들 위주였지만 그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내가 보지 못했던 진실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형 처음엔 얼마나 재수 없었는지 알아요?"

"뭐 인마, 재수?"

"인사를 해도 받지도 않고. 뭐 저런 건방진 인간이 있나? 싶었죠."

"야 이x끼야. 니 선배인 나도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저 x끼 언제 한번 밟아야겠다 싶었다고"


쓴 소주를 원샷하며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그날의 소소한 충격을 잊지 못한다. 그 이후 나에 대한 객관화는 조금씩 진전 됐다. 감당하지 못할 진실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심지어 타인이 아닌 가족, 동생들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함께 자라면서 자기밖에 모르는 오빠, 형 때문에 힘들었노라고. 대학 때 과외를 하며 꽤나 쏠쏠한 용돈벌이를 하고 있었음에도 동생들에게 용돈 한 푼 준 적 없다는 사실을 뼈 아프게 기억하고 있었다.


가장 큰 균열은 나를 10년 넘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봐 왔던 지인의 한마디였다. "당신,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인 거 몰랐어?" 오직 나 밖에 모르는 존재. 내가 가진 것을 왜 나눠야 하는지 인식조차 없었던 나르시시스트. 


누구에게나 일정 수준의 나르시시즘, 자기애는 있게 마련이다. 인스타 같은 SNS로 불특정 다수와 엮여 수시로 자존감을 짓밟히는 현대에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의 나르시시즘은 보약과도 같다. 자기를 한없이 비하한다거나 우울증에 빠지는 일 보다야 내가 잘났다 철판 깔고 사는 게 백배 낫다.


문제는 전혀 다른 종류의 나르시시스트가 있다는 점이다. 그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이기주의자 정도로만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병적 나르시시스트라면 이건 다른 문제다. 애초에 공감능력이라는 배선 자체가 형성되지 않은 채 태어나 머리 뚜껑을 열어 물리적 배선을 잇지 않는 한 배움이나 관계를 통해 공감능력을 키울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소시오패스 못지않은 관계의 파탄을 불러온다. 평생 특정 색을 못 보는 색맹처럼 공감이라는 인간의 기본정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상태로 오직 제 자신의 이기심만을 위해 평생을 살아가는 시한폭탄인 셈이다.


다행인 것은 이런 수준의 나르시시스트들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 주변에 흔히 보이는 평범한 나르시시스트들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조건부 사랑을 받고 자랐을 확률이 높다. 공부를 잘하면 사랑해 줄게, 바른 아이로 크면 예뻐해 줄게... 그런 조건부 사랑 속에 자라는 아이는 자기 내면을 속이고 외연을 부풀려 "나좀 봐주세요" 스스로를 과장하게 마련이다. 부모의 한없는 사랑에 의심은 없지만 표현이 잘못된 경우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마치 나의 어린 시절처럼. 


이들은 계기만 있다면 스스로를 돌아볼 힘이 남아 있다. 아주 작은 내면의 균열이라도 일으켜 그 이후가 계속 신경 쓰인다면 그 사람은 높은 확률로 병적 나르시시스트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내가 나르시시스트일 수 있음을 처음 알게 되고 느꼈던 낭패감은 이내 희망으로 바뀌었다. 공감능력은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보는 일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얼마든지 개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꽤 뼈 아팠지만 '지금까지의 나는 무엇이었는가?' 를 돌아보게 된 계기를 마련 해준 모든 기회에 감사한다. 여전히 내가 가장 중요하고, 나라는 우주로부터 모든 시작과 끝이 생성된다는 믿음 또한 굳건하지만 '앞으로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 라는 질문을 추가하게 됐다.


나는 여전히 나르시시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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