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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Jun 08. 2023

노트북이 사망하셨습니다

반백의 노트북

나는 반백이다

오십에 가까워지고 있으니 그래서 반백이다

갈색머리가 흰머리로 절반을 덮었으니 그래서 반백이다

책을 두권 낸 작가지만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수입에 허덕이는 백수에 가까우니 그래서 반백이다


반백은 매일 읽고 쓴다. 글쟁이에게 노트북은 생명줄과 다름없다. 그런데 그 노트북이 망가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키패드 곳곳이 하얗게 벗겨지기 시작하더니 A 키가 먹히지 않고 차츰 N, B, T, 숫자 7, 0순으로 먹통이 돼버리는 것 아닌가? AS 맡기면 그만이지 웬 호들갑이야? 싶겠지만, 삼성도 LG도 아닌 그 악명 높다는 MS 제품인 게 문제였다. 미국 본사로 AS를 보내거나 사설 수리를 맡겨야 하는데, 십 수일에 달하는 기다림의 시간은 물론, 비용문제도 컸다. 


퇴사와 함께 중고나라에서 미개봉 세제품으로 업어온 MS 서비스 랩탑3는 3년이 넘도록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반백의 하루를 함께 해온 동지와 다름없었다. 생각해 보니 이 놈으로 책 두 권을 쓰지 않았던가? 저장된 글만 a4지로 2500여 장이다. 단행본으로 치면 25권 분량 아니던가?


하필 몸체부터 키보드까지 온통 검정색이라 군데군데 허옇게 드러난 벗겨짐이 3년 넘는 반백생활에 지친 내 마음 같다. 당장 글을 써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블루투스 키보드를 사서 임시로 써야 할까? 현실적 고민도 잠시, 문득 물건 하나를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열렬히 쓴 적이 있었던가? 그 망가진 물건을 지켜보며 어떤 한 시대가 끝나버린 것 같은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내게 남겨진 것들은 뭐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고 보니 회사를 그만두기 전까지만 해도 가진 것이 꽤 됐다. 이 나이까지 소유의 최정점인 내 집은 장만하지 못했지만, 차도 있고 고가의 자전거도 있고 필요한 것과 가지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한 적은 거의 없었다. 소비성향을 굳이 따지자면 합리성을 중요시하는 미니멀리스트와 맥시멈니스트의 딱 중간정도랄까? 사고 싶은 것이 생기면 시간을 들여 살펴보고 합리적으로 구매하기를 좋아하는 편으로 아울렛을 즐겨 찾기도 했다.  


퇴사 이후에는 소비는커녕 갖고 있는 것들을 정리하기 바빴다. 우선 차를 팔았다. 고속도로위에서 생긴 공황장애로 장기간 차를 운전하지 못하게 된 탓도 있었지만, 세워두기만 해도 나가는 자동차세, 보험료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유일한 취미나 다름없었던 로드바이크도 팔았다. 시세대비 손해를 보면서까지 서둘러 팔아치운 이유는 생활비가 급했기 때문이다.


반백은 반강제로 미니멀리스트가 됐다. 최신 유행 신제품 하나 없고, 어디 한군데가 빠져 삐거덕 거리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궁상 맞다는 핀잔을 하게할 망정, 최후까지 버리거나 팔아넘기지 못한 물건들이 마치 생명을 가진 동반자 같다.   


장렬히 전사한 MS서피스 랩탑 3를 책상앞에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이제 보낼 때가 됐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침 특강료가 들어와 돈도 있다. 새 노트북을 사기로 했다. 새 노트북이라 봤자 당근이나 중고나라를 뒤져 싼 것을 찾아야 한다. 작년 겨울 10만 원짜리 롱코트를 2년 만에 처음으로 구입한 이후, 목돈이 들어가는 두 번째 소비가 될 것 같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할 뿐" 니체는 말했다.


노트북은 사망했고 여전히 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또 악착같이 살아남을 것이다. 반백의 오랜 동반자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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