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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Jun 07. 2023

세 번째 원고, 출간을 포기하며

"책 언제 나와?"

"글쎄? 이제 막 원고 끝냈고, 이번엔 대형 출판사 위주로 던져보려고. 잘 될 것 같아. 감이 좋아."

세 번째 책이 언제 출간되는지 묻는 지인에게 이렇게 큰 소리를 쳤다. 3년이 넘도록 집에 돈 한 푼 가져다주지 못하는 현실이 맘에 걸 허세 낀 반응이 툭 튀어나왔는지도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글을 쓰면서 나름의 확신도 있었다. 지난 두 권의 책에서 얻은 날카로운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절치부심 공들여 썼으니까,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읽고 쓰고 고민했으니까, 뭐 출간은 기정사실이고 어디에서 내느냐? 의 문제라고만 여겼다


지난주 화요일,  출간기획서까지 완성하고 원고 투고를 시작했다. 이틀 동안 메일을 보낸 출판사를 헤아려보니 대략 스무 곳 남짓. 책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알만한 출판사들이다. 이미 많으면 다섯 번씩 투고를 했던 터라 혹 내 메일이 스팸 처리되지는 않았을까? 걱정도 하고, 바빠죽겠는데 또 이 인간이네? 투고 메일을 받을 편집자들의 속내를 넘겨 짚기도 하며...


답메일은 기다리지 않는다. 대개 기쁜 소식은 전화나 문자로 오게 마련이니까. 예상한 대로 내용이 뻔히 짐작되는 거절 메시지 몇 개가 도착했다. 검토에 2주 걸린다거나 회신이 없으면 출간의사 없는 줄 알라는 그다지 창의적이지 못한 답변. 특히 투고 2시간 만에 네 원고를 출간 의사가 없다는 확실한 거절 답변은 오히려 속 시원했다.


그날 저녁 무렵 도착한 모 출판사의 답변은 조금 독특했다. 뻔한 거절 메일치고 원고를 일부 읽어봤음이 분명했다.


문체가 글의 핵심을 가린다.

목차만으로 내용파악하기가 힘들다.

어수선하다. 어수선하다...


길고 긴 회신메일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출판사의 의도가 명확해졌다. '다듬어 줄 테니 300권을 사라'...말하자면 반기획 출판 제의. 그들의 피드백이 마음에 걸리더니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주말, 최근 생긴 인연을 통해 요청한 또 다른 피드백이 도착했다. 원고를 무려 세 번 읽은 후 작성했다는 피드백은 여러 면에서 나를 놀라게 했다. 아니 세상 어느 누가 자기 일도 아닌 일에 이런 시간과 정성을 들여 세세한 피드백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있는 그대로 느낀 바를 솔직하게 이야기해 달라는 요청답게 보완점 위주의 피드백은 날카로웠다. 선의로 포장된 입발림보다 귀한 진짜 독자의 목소리.


독자의 반응에 자신의 생각을 옹호하거나 방어하지 말라.

[하버드 글쓰기 강의]를 쓴 바버라 베이그의 말이 아니라도 그쯤은 알고 있다.


주관적 시야가 걷히고 독자의 눈으로 내 원고가 들어오면서 확신이 들었다.

'이거 안 되겠구나.'

원고는 여전히 관념어 투성이었으며 현실 속 직장인들의 손에 턱 잡히는 진짜 솔루션을 제시하는데 부족했다. 다행히 객관화가 된 눈으로 보더라도 [밑 MEET 빠진 조직문화]라는 컨셉의 가능성만은 붙들었기에 이곳저곳 마구 투고하면 눈먼 출판사를 만나 어떻게든 시장에는 나올 수는 있겠다 싶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작년 7월, 두 번째 책 원고를 투고하던 날엔 비가 내렸다. 투고를 마치고 왠지 모를 착잡한 마음에 우산을 쓰고 집을 나섰다. 집 근처 한강 둔치는 사람도 비둘기도 까치 한 마리도 없이 홀로 비에 젖고 있었다. 슬리퍼 차림으로 물웅덩이가 된 둔치길에 서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던 한강과 저 멀리 잠실철교에 일정한 리듬을 만들며 오고 가는 전철들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책을 써서 유명해지는 게 아니라 유명하니까 책을 쓰는 걸까?'

나오기만 한다면, 내가 가진 이 멋진 글과 생각과 기똥찬 아이디어들을 펼쳐낼 수 있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들이 빗방울처럼 떨어 내려 머리속에 둥근 파장을 만들어냈다.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소파에 앉을 찰나, 거짓말처럼 한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XXX출판사는 출간 의사가 있습니다] 하늘을 가득 채운 비구름을 뚫고 우중충한 거실로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했다. 그날 저녁 또 다른 출판사에서도 제의가 왔다. [저희랑 함께 하시죠?] 지난 2년의 노력이 이렇게 보상받나 싶었다.


치열했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깊어지던 10월의 마지막날, 두 번째 책은 세상에 나왔고 그때는 정말 뭐라도 되는 줄 알았지. 진부한 아침 드라마가 그렇듯 현실은 뻔했고, 냉정했고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르지 않는 이상, 두 권의 책이 나에 대해 증명해주는 것은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간 사이에 제3의 눈이 탁 하고 뜨여 나를 둘러싼 세상의 프레임을 조금 더 넓혀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게 소득이라면 소득일까?


일요일 오전, 1순위로 염두에 두고 투고를 했던 출판사 대표에게 회신 메일이 도착했다. 지난 여름 투고에서 인연이 맺어지진 않았지만, 원고에 대해 관심 있는 분야라 검토해보겠노라는 메시지를 줬던 것이 크게 남았던 모양이다. 1인 출판사로 시작해 조직문화 분야의 베스트셀러를 가지고 있으면서 책에 대한 진심이 느껴지는 대표의 인터뷰를 보고 한번 쯤 같이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대표는 지금은 신간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 한 달 말미를 주면 검토해 보겠노라고 했다.


사실상 거절의 메시지로 읽혔지만, 만에 하나? 라는 기대감이 없진 않았다.

시간을 두고 생각할 수록, 답은 한가지로 모아졌다. 이 번 원고는 어렵다. 괜한 시간 낭비일 뿐. 결론이 내려지자 마음이 급해졌다. 바로 이메일을 썼다.


"...원고 검토에 시간 쓰지 말아 주셨음 해서 현충일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메일 드립니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피드백을 받고 저 스스로도 객관적으로 검토해 본 결과

여전히 함량 미달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98% 의 확률로 괜한 시간 낭비가 되실 것이 분명합니다

검토해 주시겠다는 말씀만으로도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공들여 쓴 원고가 아깝고 속 쓰리지만

그 과정을 통해 또 한 번 성장했다고 믿습니다


조만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조직문화 스페셜리스트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때는 먼저 요청을 주실지도 모르겠네요


바쁘실 테지만 쉬엄쉬엄 건강도 잘 챙기세요

감사합니다."


이 원고로 더는 투고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혹여 눈먼 출판사가 같이 해봅시다. 요청이 오더라도 내쪽에서 거절할 생각이다.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 내는 일이 평생의 버킷리스트던 시절은 까마득하다.

실패하면, 그 꿈마저 잃을지 몰라 머뭇거렸던 시간도 왕년이다.


실력이 뒷받침 되지 않은 우연은 의미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너지고 자빠지고 구렁텅이에 빠져 만신창이가 되도 또 일어서 다시 걸을 뿐이다. 이미 돌아갈 다리가 불타버린 마흔여덟의 반백의 무명작가는 곧 닥칠 미래를 상상한다.


"작가님 이번책은 꼭 저희랑 내시죠!"

입꼬리가 씰룩 움직인다. 다시 노트북을 열고 책상앞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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