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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Jun 12. 2023

좋은 신발은 주인을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대

반백의 물건들_4. 아디다스 올검 슬립온

2만 원짜리 검정색 아디다스 슬립온은 내 최애 아이템이다. 어디에서 산 건지 가물가물하지만, 아마도 가산동에 있는 W몰이었을 것이다. 가산동 아울렛 단지를 다니기 시작한 것은 대략 5년 전쯤인데 W 몰을 비롯해 마리오 아울렛 등 대형 쇼핑몰이 몰려 있어 발품을 파는 재미가 쏠쏠했다.


신발을 포함한 내 패션 취향은 비교적 명확하다. 이런저런 장식 없이 심플한 디자인을 선호한다. 나 이런 브랜드요!!! 악을 쓰는 듯한 디자인은 노땡큐다. 로고가 있더라도 자세히 봐야 보일만큼 은은하게 붙어있거나 아예 보이지 않아도 개의치 않는다. 유행도 타지 않는다. 길에서 전철에서 행여 나와 같은 종류의 옷이나 신발을 입거나 신은 사람을 보면 왠지 불편할 만큼 남들이 우~하는 최신 브랜드, 제품을 제 손으로 사서 입고 신어본 적은 없다. 가장 트렌디한 것이 가장 뒤처진다고 생각하는 편


이렇다 할 장식 하나 없이 밑바닥까지 연탄마냥 검은 슬립온을 보고 누군가는 검정 고무신이라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끈을 묶을 필요도 없이 발을 쏙 집어넣으면 그만인 편안함, 때가 타도 티 날 걱정 없는 민무늬 올검의 담담함이 마음에 들었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 내가 가진 신발은 딱 세 종류였다. 정장용 구두 한 켤레, 운동화 한 켤레, 그리고 슬립온 한 켤레 그중에서도 뭐 하나 걸구칠 게 없는 슬립온을 특히나 마음에 들어 했다.


퇴사를 한 이후 나갈 일이 없어졌다. 정장구두는 3년이 넘도록 신발장 안에 처박혀 있다. 약 5년 전쯤 선물 받은 정장 구두는 고급스럽고 멋졌다. 좋은 신발은 그 주인을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고 했던가? 이런저런 이유로 출근할 때도 잘 신지 않았는데 3년이 넘도록 백수 생활을 이어가는 것을 보면 구두의 미움을 샀는지도 모른다


그 흔한 명품 하나 없다. 어쩌다 선물이라도 받아 몸에 걸치기라도 하면 도무지 어색해서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선물을 준 사람이야 잘 입고 차고 메고 있나 살펴보겠지만, 명품을 몸에 두르는 일은 참으로 고역이다. 타고난 싼마이 인생인가? 싶다가도 사람 자체가 명품이어야지 물건이 명품인 게 무슨 소용인가? 그 개똥철학만은 여전하다. 그렇다고 나라는 사람 자체가 명품이라는 소리는 더더욱 아니다


명품은커녕 퇴사 이후 반찬 딜리버가 됐다. 주 1~2회 본가에 반찬을 가지러 가는데 김치며, 불고기며, 미역국이며 백수 아들 배곯지 말라고 챙겨주신 음식을 10리터짜리 등산용 배낭에 실어 나르기엔 이 슬립온 만한 게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맑은 날이나 발에 꿰어 신고 다녔다. 가끔 소중한 인연을 만날 때도 바람을 쐬러 전철 여행을 할 때도


비가 촉촉이 내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반찬을 가지러 가는 길에 발이 흠씬 젖었다. 밑바닥에 구멍이 뚫렸던 모양이다. 신발 하나를 구멍이 뚫릴 때까지 신었던 적이 있었던가? 버스 좌석에 앉아 내 몸 반만 한 등산용을 배낭을 벗어 내려놓고 비 오는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신발을 들어 바닥을 살폈다. 구멍이 아니라 숫제 밑창 절반이 뜯겼나갔구나. 여기저기 뜯기고 상처 입은 몸뚱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이토록 무표정한 무덤덤함, 더함도 모자람도 없이 딱 그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해준 아울렛에서 산 2만 원짜리 아디다스 연탄 슬립온.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 버리지 못하고 한동안 간직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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