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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Jun 10. 2023

백수도 귀 호강합니다

반백의 물건들 _ 3 하만카돈 오라스튜디오 2

이거 큰 일 났다. 

반백 주제에 음악을 부러 찾아 듣기 시작했고 5만 원짜리 AKG 헤드폰을 3년간 쓰면서 더 좋은 음질에 대해 조금이나마 갈망하게 되어버렸으니. 매슬로는 생존 욕구가 채워지면 그다음 욕구로 넘어간다고 했는데 내 생존은 괜찮은가? 싶기도 하고.


계산기를 두드려본다. 한 달 10만 원, 하루 약 3천 원 정도 되는 내 가처분 소득?을 생각하면 먹고 전철, 버스비 내고 최소한의 생필품을 구매하는데도 모자랄 판에 취미를 위한 물건이라니 안되지. 도리질을 한다.


뭐 그래봤자. 주말 아침 귀에 익은 옛날 노래 몇 곡과 약간의 클래식과 영화, 애니메이션 OST와 요즘 나온 노래 중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몇 곡을 플레이 리스트 삼아 듣는데 그냥 노트북 스피커로 들으면 그만이지 싶어 포기했다가도 


하, 비 오는 날 베이스가 꽝꽝 울리는 고음질 스피커에서 쏟아져 나오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no.2의 리듬감은 어떨까? 존레전드의 all of me의 음색은 어떨까?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 그 비장감은 어떨까? 도무지 그 호기심이 가시질 않는다.


당근이었나? 중고나라였나? 를 뒤져 이리저리 찾아본다. AKG처럼 대략 5만 원대 스피커는 없을까? 어느 마음씨 좋은 판매자가 눈이 홱 돌아 어마어마한 스피커를 싼 값에 내놓지는 않았을까? 또 뒤진다. 스크롤을 올렸다 내렸다 한다.


음향기기에 대한 전문성 따위는 없고 그저 귀에 익숙하다 싶은 브랜드들을 살펴본다. JBL 은 많이 들어봤고. 어? 아 이게 AKG 하고 같은 회사 브랜드였네? 삼성에서 인수한 하만카돈 그룹이라고? 정확히는 잘 몰라도 고급 오디오 브랜드라는 사실만은 얼핏 알고 있던 차에 하만카돈 제품들이 들어온다. 


그중 눈길을 사로잡은 건 둥근 유리관 모양의 외관에 내부에 뻥 뚫린 진공관이 이어진 독특한 디자인의 오라 스튜디오2 모델이었다. 스피커라면 이렇게 생겨야 한다는 클리셰를 과감히 깨버리기라도 하듯, 마치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던 시절의 앰프처럼 생겨 묘하게 끌렸다.


이렇게 생겼다


신품 가격은 대략 20만 원 중후반대, 미개봉 새 제품이 15만 원에 올라와 있었다. 유튜브를 뒤져 후기를 찾아보니 아, 괜찮다. 수백, 수천에 달하는 진짜 하이엔드급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하만카돈 브랜드에 부끄럽지 않은 음질을 선사한다고 했다. 


그런데 15만 원이라는 가격이 걸린다. 이리저리 계산을 해본다. 사고 싶은 마음이 앞서다 보니 이래저래 가능한 이유를 만든다. 하, 빽다방 커피는 끊어야겠지? 한 달에 두어 번 마음정리 겸 바람 쐬러 가는 낙성대 나들이도 두어 달 멈춰야 한다. 대신 비 오는 어느 저녁 묘한 모양의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기분 좋은 소리에 취해 두 눈을 감고 귀에 익은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 나를 상상한다.


결심이 서면 그 즉시 이행한다. 약속을 잡고 전철을 타고 구매자와 만난다. 미개봉 새 제품이니 확인할 것도 없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15만 원을 이체하고 박스채 스피커를 안고 돌아온다. 전원을 넣고 노트북에 연결하고 왈츠 no.2 부터 플레이. 


아아, 이런 신세계가 있었나. 내 심장에 직접 닿는듯한 베이스음, 저음과 고음이 뭉개지거나 찢어짐 없이 안정적이다. 무슨 음향 전문가처럼 이야기했지만 쥐뿔 아무것도 모르는 막귀에도 뭔가 다르다는 느낌은 확실했으니 그날 이후 하만카돈 오라 2는 무수한 플레이리스트들을 주말마다 연주해 냈다.


삶에 공부에 지쳤던 식구들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플레이리스트에 귀를 기울인다. 치열한 삶, 앞이 안 보이는 터널 속에 어디선가 은은히 들려오는 희망의 소리. 하이엔드 스피커가 별 건가 싶다. 오라3가 나왔고 음향의 세계 역시 무궁무진하지만 난 이녀석과 함께 오늘도 귀호강 중이다.


삶이 무료하고 힘들 때 스피커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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