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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Jun 13. 2023

아름다운, 갈색 머리!

반백의 물건들 _ 5. 브라운 헤어

아름다운, 갈색 머리!

이런 카피가 있었다. 7~80년대생이라면 한번쯤은 접했을 염색 광고에서 나온 짧고 강렬한 카피였는데, CM송이라고 하기엔 짧고 그냥 카피라고 하기엔 음률과 멜로디가 강렬해 기억에 여전히 남아 있다.


하필 내 머리색이 밝은 갈색, 브라운 헤어다. 스포츠머리로 짧게 깎아야 했던 고등학생 시절이나 군대시절에는 염색을 했느냐며 억울한 꾸지람이나 지적질을 받기도 했다. 대학시절에는 당시 유행했던 영화의 제목을 본따 노랑머리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했다. 새로운 미용실에 가면 십중팔구 염색이 자연스럽다고 운을 떼거나, 자연색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호들갑을 떨며 염색할 돈 굳었다는 말을 듣곤 했다.


거기에 곱슬기 하나 없이 찰랑거리는 갈색 생머리는 보기에는 좋았지만 조금만 짧아지면 뻗치는 통에 손질하는데 애를 먹어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주는 애물단지나 다름없었다.


그런 이유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머리 스타일을 한 가지로 고정했는데, 단발까지는 아니지만 앞머리는 이마를 거의 덮고 머리가 목뒤를 덮을 정도로 길게 내려온, 남자치고는 긴 스타일을 유지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내 이미지에 갈색 생머리를 얹기 시작했다.

"L님 머리색 참 예뻐요."

"머릿결 참 부럽네요."


스트레스였던 갈색 머리가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내심 자부심 같은 것도 생겼다. 미용실에 가면, 자연색인 것을 알아봐 주기를 바랐고 그들은 어김없이 머리색과 머릿결에 대한 헤어디자이너로서의 첫인상을 건넸다.


이후 10여 년의 직장생활 동안 내 머리스타일은 한 가지로 고정됐다. 언젠가 한 번은 머리스타일이 지루해져 가르마 방향을 바꾸고 출근한 적이 있었다. 나름 변화를 주기 위한 시도였는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그날 하루 전체를 망치고 다음날 바로 원상 복귀했다. 마흔이 넘으면 고작 머리스타일을 바꾸는 일에도 주저하고 망설이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기 마련인 것일까? 그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정체되고 나라는 존재가 매몰되어 간다는 느낌 속에 퇴사라는 단어를 현실로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이. 그리고 결심했다. 퇴사를 하면 머리스타일부터 바꾸기로. 완전히 새까만 흑단 같은 색으로 염색도 해보기로.


퇴사라는 씨앗을 마음에 품고 하루하루 고민하던 시간 동안 내 은근한 자랑이던 브라운 헤어는 못 보던 것들의 침략을 받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새치. 처음 한 두 가닥은 족집게로 뽑아냈다. 해가 거듭될수록 새치의 숫자는 급격하게 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마음에 품었던 퇴사라는 씨앗은 3년 만에 발아해 마침내 현실이 됐다.


퇴사한 그다음 날 결심한 것부터 이행하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남자 헤어스타일을 이리저리 찾아보며 적당한 스타일을 골랐다. 가르마 방향을 바꾼 것도 그렇게 신경 쓰였는데 괜찮을까? 두려움이 앞서려기에 버럭 내게 화를 냈다.


'아니, 인마! 회사도 그만둔 주제에 그까짓 걸 겁내는 거야?'


그 길로 미용실에 달려가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리젠트 스타일로, 짧게 잘라주세요"

"이 스타일 오래 유지하셨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보다 흰머리가 많아져서 흉하죠?"

"어유 그나마 다행인 줄 아세요. 머리색이 원체 밝은 편이라 잘 티도 안 나지 뭐예요."

3년째 머리를 봐주고 있는 헤어 디자이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며 머리를 척척 잘라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브라운도 갈색도 아닌 복합의 색을 가진 머릿단이 수북이 쌓여간다.


30분 후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며 후회했다.

'왜 진작 바꾸지 못했을까?'

온몸을 두껍게 짓눌렀던 삶의 무게가 죄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짧은 머리는 그 나름의 깔끔함이 있었다. 어색하면 어쩌나? 안 어울리면 어쩌나? 누가 이상하다고 하면 어쩌나? 온갖 걱정 속에 실행하지 못한 일이 비단 머리 스타일 바꾸는 일뿐일까?


퇴사 후 새로운 시작점으로 머리 스타일을 바꾼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다. 감정을 털어내기 위해 왜 여자들은 머리스타일을 바꿀까? 를 이해하게 된 그날. 내 머리와 나 자신의 새로운 자부심을 만들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3년 4개월이 지난 지금 내 머리는 절반이 흰머리로 덮였고 더 이상 젊은 시절의 찰랑거림은 찾을 수 없다. 미간 사이 주름은 깊어졌고 입 주변 팔자주름도 선명해졌다. 그 굴곡만큼 나는 어떤 깊이가 생겼을까?


"아니, 머리색이 왜 이렇게 됐어?"

최근 3년 만에 만난 지인은 대번에 머리색부터 알아봤다. 짧게 바뀐 머리스타일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이전의 머리 스타일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없었을 것이다. 찰랑거리는 브라운 헤어는 어쩌면 내 젊은 날을 기억하고픈 나만의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잿빛 너구리라고 알어? 지금 니 머리가 그래. 머리 염색좀 해."

"그냥 이대로 살게"


세월에 저항하지 않고 흐르는대로 맡겨 두는 것 또한 그 나름의 멋이 아닐까? 앞으로도 머리를 염색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갈색 머리는 이제 없지만, 잿빛 머리도 괜찮다.


자연스러움이 더 아름답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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