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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Jun 20. 2023

연봉 800에 BMW 탑니다

반백이 가진 것들 _ 7. 교통편

3년 5개월째 BMW를 이용하고 있다. 


Bus, Metro, Walk

언제 적 아재개그냐? 싶겠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중에서도 메인은 주로 걷기. 버스, 전철 2~3개 역 정도는 걸어 다닌다. 반백 신세에 정기적으로 외출할 일도 없고 차편을 이용할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 본가에 반찬을 가지러 갈 때는 버스를, 기분전환을 하러 갈 때는 전철을 이용한다. 


퇴사를 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차를 파는 일이었다. 생애 첫차로 출시 시점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K5초기 모델을 신차로 구입해 8년 가까이 탔다. 총 주행거리는 약 6만 킬로 정도. 운전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보통 1년에 2만 킬로 가까이 탄다고 하니 뻔질나게 어딘가를 돌아다닌 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차를 모셔놓은 것도 아니다. 부산이며, 완도며, 강원도며 여기저기 그럭저럭 누비고 다녔다.


8년간 추억이 담긴 내 차의 키를 업자에 넘기면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에 잠시 휩싸였다. 섭섭함,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내 의지로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 얼마나 연속될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얼마간의 후련함 따위의 감정들.  


퇴사를 한 후 코로나가 겹친 것은 내게 있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차를 팔아넘기면서 애저녁에 가족여행 따위는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차에 아이에게 그럴듯한 핑계를 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이던 아이는 고1이 되었고, 영원할 것 같던 코로나도 끝났다. 왜 우리 가족은 여행을 가지 않는지(아니 못 가는지) 둘러댈 핑계를 찾아야 할 판이지만 그 사이 철이 들은 건지 집안 사정을 알고 포기를 한 건지 아이는 별다른 말이 없다.


그 외에는 생각보다 차 없는 불편을 겪을 일이 없어 내심 놀란다. 연중행사로 양평에 위치한 산소에 가거나 가뭄에 콩 나듯 들어오는 지방 강연, 교육 요청이 있을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면 소카나 공유 서비스를 이용한다. 가격이 만만치 않고 아무래도 자차보다는 불편함이 크지만 급할 때 나름 쓸만하다. 사람 나름이겠지만, 크게 활동적이지 않고 정적인 내 경우 차 없이도 살아지더라는 말.


BMW를 주로 이용하게 되면서 얻은 것들은 꽤나 많다. 


우선 교통비가 줄었다. 월 2만 원 안팎. 그마저도 내 한 달 가용자금의 20% 수준이지만 이전에 비하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2만 원 안쪽으로 줄이기 위해 걷는 거리를 조금씩 늘려가고 있다.


건강이 좋아졌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면서 운동 겸 움직임이 생활화되어 고질병 같던 식도염도 사라지고 혈당이나 고지혈, 고혈압 같은 증상이 사라졌거나 좋아졌다.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배는 불룩 튀어나오던 이티 체형도 정상으로 돌아갔다. 물론 아침마다 1시간씩 유지하는 맨손 운동 덕이 크지만, 걷는 습관 역시 한몫 단단히 했다.


세상의 풍경을 유심히 지켜보며 작은 일에 놀라고 기뻐하고 경탄할 줄 알게 됐다. 무엇보다 관찰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관찰을 토대로 무언가를 깨닫는 일이 잦아졌다. 버스 뒷자리에 앉아 오가는 군상들의 다양함, 천 가지 표정, 바람에 불어 흩날리는 나뭇잎과 꽃 따위 도심 속 자연, 지하철 맞은편 사람들의 옷차림과 신발, 양말의 높낮이와 무언가를 들고 있는 손, 어딘가에 집중하는 낯선 사람들을 지켜보게 됐다.


이전이라면 못 보고 스쳐 지났을 무수한 내 주변의 변화들을 인식해 무미건조하던 시간이 입체화되고 풍요로워지기 시작했고 가장 놀라운 것은 그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나는 나를 포함한 무엇을 모르고 또 모른 채로 행동하고 있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이런 변화를 사회에서 도태된 패배자의 자기 위안, 변명 정도로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다들 너만큼 몰라서 회사에 남아 버티는 줄 아느냐?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를 운용할 돈이 없어 사용 못하는 주제에 저 포도는 시어서 안 먹는다는 듯 뻔한 핑계를 대느냐?라는 날 선 비판 말이다.


내게 주어진 모든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선에서 최선일 마음가짐을 다진다. 물건에 그다지 욕심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좋은 자동차를 타고 싶다는 욕망 역시 버리지 않는다. 언젠가는 진짜 BMW를 뽑을 날도 올 것이라는 기대를 품은 채로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2~3 정거장을 걸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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